[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눈을 밟거나 눈에 밟히거나
[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눈을 밟거나 눈에 밟히거나
  • 뉴욕=신지혜 시인
  • 승인 2020.11.21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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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용 시인

눈을 밟거나 눈에 밟히거나

뭉텅이 눈이 골목길을 지우고 있다 
어머니가 드나들다 미끄러질까 봐 현관을 쓸고 나니
이층 주인집 계단이 눈에 밟힌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쓸고 돌아서니 
옆집 독거 할머니가 눈에 밟혀 
대문까지 길을 낸다
눈은 계속 내려 쓸었던 길을 지우고 
술 한잔하고 귀가하는 홀아비가 눈에 밟혀
골목 입구까지 쓴다 
무작정 내리는 눈은 내 배려를 지우고 
내 눈은 다시 엄마를 밟고 이층집 주인을 밟고 
독거할머니를 밟고 홀아비를 밟는다
밟고 돌아서면 없어지는 길
눈에 밟히는 것들은 눈 시리고 
길을 지우는 눈은 하염없이 나를 
밟고 있다. 



따뜻한 시 한 편이 그 어떤 혹한도 단숨에 녹여줄 수 있다면 바로 이 마법처럼 푸근해지는 시다. 이 시에 당신의 얼음덩이를 녹이며 깊은숨을 내려놓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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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을 만나면 그저 아무 말 없이, 두 손 꼭 잡아주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런 세상이 되어야 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런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보다도 남을 배려하고 돌아볼 줄 안다면 그는 이미 깨달은 각자(覺者)이다. 그가 선방에서 굳이 좌선하지 않아도 백팔 번 절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세상 자비심으로 경계 없이 두루두루 선행한다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더 채우지 못해 혈안인 이 시대에, 시인의 무량한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해보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자성케 된다. 시인의 집 앞 눈덩이만 치우는 것이 아니라 식구 같은 이웃들마저 줄줄이 눈에 더 밟혀와서 끝없이 눈발을 치워주고야 마는 이 시인의 큰마음에 절하고 싶어진다. 이 세상엔, 오직 자신만을 향해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거나, 그 누구도 뚫지 못할 철갑 옷으로 자신을 단단히 무장한 채, 각축전을 벌이는 이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런 대인이 있으며, 어찌 이렇게 큰 시가 있단 말인가.

이 무장해제된 시인의 넉넉한 도량과 시의 푸근함으로 하여, 올겨울, 폭설이 첩첩산중으로 겹겹이 쌓인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진다. 그래서 이 지구는 또 이런 힘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선용 시인은 2015년 《우리詩》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뭔 말인지 알제』와 『지금, 환승 중입니다』가 있다. 제11회 복숭아문학상 시 부문 대상, 2015년 근로자 문학제 시 부문 입상, 제6회 포항소재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제4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시 부문 입상, 제16회 용인문학 신인상 시 부문, 제9회 농촌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우리詩》 편집주간이다.

필자소개
《현대시학》으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시 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미주시인문학상, 윤동주서시해외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세계 계관시인협회 U.P.L.I(United Poets Laureate International) 회원.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뉴욕코리아》 《LA코리아》 및 다수 신문에 좋은 시를 고정칼럼으로 연재했다. 시집으로 『밑줄』, 『토네이도』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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