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칼럼] 미국도로에서 재현되는 모세의 기적
[김재동칼럼] 미국도로에서 재현되는 모세의 기적
  • 김재동(재미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10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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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시간이 되면 고속도로나 일반도로, 어디나 할 것 없이 길이 막힌다. 갑자기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siren) 소리가 들린다. 경적과 사이렌을 동시에 울리며 소방차가 나타나자 꽉 막혀 있던 도로가, 홍해가 갈라지듯 거짓말처럼 양쪽으로 갈라진다. 그 많은 차량이 일사불란하게 일렬로 도로변에 줄지어 서고, 소방차가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준다. 한쪽 도로만이 아니다. 반대쪽 도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양방향 도로가 시원하게 뚫린다.

미국에 와서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한 직후이니, 초보운전 시절이었다. 동네 길만 운전하다 처음 차를 몰고 시내 대로변으로 나간 날이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소방차가 경적을 울려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달리던 차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고, 길은 벌써 열려있었다. 그 넓은 대로를 나 혼자서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허둥대다 겨우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 뒤를 따라오며 빵빵거리던 소방차가 고막이 터질듯한 경적을 계속 울려대며 시원하게 갈라진 도로 중앙을, 그 뒤를 이어 구급차(Ambulance)가 질주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화재나 응급상황이 발생해 911에 구조요청을 하면 반드시 소방차와 구급차가 동시에 출동한다.

“화재나 응급환자 발생 시 골든타임은 단 5분으로, 이 시간이 지나면 인명 및 재산피해가 급격히 증가하고 심정지, 호흡곤란 환자는 뇌에 치명적 손상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작년 119의 현장 도착 평균 시간은 8분 18초로서, 골든타임인 4~6분 이내 도착률은 32.8%에 불과하다. 교통량 증가, 불법 주정차, 그리고 양보의식 부족이 주된 원인이다.”(코리아헤럴드 생생뉴스에서 발췌)

위의 코리아헤럴드 기사에서처럼, 미국에서는 도로가 막혀, 환자를 싣고가다 구급차 안에서 골든타임(golden hour)을 놓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또 화재 시 소방차가 좁은 길이나, 길 막힘으로 인해 현장 가까이 접근하지 못해, 건물이 전소되거나 인명피해가 느는 일도 흔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화재 시 소방차 접근이 어려워 골든타임을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피해를 키운 화재가 연 928건에 달한다. 소방차가 아예 진입할 수 없는 좁은 길도 전국에 1490곳에 이른다고 하며, 전국 아파트 478곳은 화재가 발생해도 소방차가 단지 내에 진입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미국에서는 상업지역이든 주거지역이든 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는, 소방차와 소방호스가 불이 난 건물에 접근이 용이하게 되어있다. 복잡한 시내를 운전하다 보면, 인도 와 차도를 구분 짓는 콘크리트 둔덕에 빨간 페인트로 칠을 해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반드시 소방호스를 연결해 물을 쓸 수 있는 송수관 연결설비, 즉 옥외 소화전(fire hydrant)이 설치되어있다.

마치 빨간 투구에 붉은 옷을 입고,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솟아있다. 도시 전체에 땅밑으로 송수관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다는 증거이다. 송수관과 연결된 옥외 소화전(fire hydrant)이 있는 곳에는 주차를 법으로 막고 있다. 화재나 비상시 소방차와 구급차만이 주차가 허용된다. 물론 주택가에도 옥외소화전 설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있다.

영국에서는 소방차 진입을 방해하는 불법 주차 차량 때문에 화재진압에 어려움이 있다면, 차를 부수며 진입한다. 한국에서처럼 대처하지 않는다. 좁은 골목 빼곡한 주차 차량 때문에 소방차 진입에 애를 먹었던, 충북 제천의 하소동 대형화재 때처럼 말이다. 당시 최초 신고가 접수된 이후 소방차는 6~7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발화지점인 1층으로 진입하는 도로에 주차된 차량 때문에 소방차는 바로 화재 현장에 진입하지 못했다. 주·정차된 차량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는 도중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의정부 화재 또한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인한 소방차 진입이 지연되면서 초동진화에 실패해 피해가 컸다. 당시 의정부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는 화재 발생 50분이 지나서야 진화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미국은 도시 역사가 긴 한국이나 유럽처럼 좁은 이면도로가 많지 않아 소방차나 구급차 접근이 어렵지 않은 이점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교통위반 딱지(citation, traffic ticket)를 발급하기 위해 경찰차가 서 있거나, 사고나 고장으로 갓길에 차량이 정지해 있을 때, 차선을 바꾸어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법에 앞선 시민의식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도시에서라도 21세기 신(新) 모세의 기적이 길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거주
작가, 한국문학평론과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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