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95] 황제의 성당과 술탄의 모스크
[유주열의 동북아談說-95] 황제의 성당과 술탄의 모스크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4.01.0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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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소피야 대성당(지금은 모스크)
하기야 소피야 대성당(지금은 모스크)

13세기 후반 지금의 튀르키예(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에 사는 어느 청년이 꿈을 꾸었다. 청년의 가슴으로 둥근 달이 들어오더니 큰 나무가 쑥쑥 자라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나무뿌리들이 네 갈래로 갈라지면서 네 개의 강이 만들어졌다. 자세히 보니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이집트의 나일강과 로마제국의 도나우강이었다. 그런데 하늘을 뒤덮고 있는 가지와 나무 잎들이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로마제국의 천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 청년은 셀주크 튀르크의 젊은 무사 오스만이었다. 그는 1299년 무리를 이끌고 셀주크 튀르크에서 독립하여 오스만 공국을 세운다. 그의 꿈 이야기는 자손 대대로 유언으로 전승되어 오스만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 성장한다. 제국의 영토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물론이고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 이집트, 서쪽으로 동트리아키를 넘어 발칸반도로 진출했다. 역대 술탄들은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지 못했다. 제국의 시조 오스만의 꿈대로 거대한 용(龍)은 그렸지만,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점을 찍어야 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이루지 못했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가본 사람은 그 도시의 지정학적 잠재력에 놀라게 된다. 4세기 대제국 로마의 수도를 이탈리아반도에서 벗어나 옛 그리스 식민지 비잔티움으로 천도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안목이 뛰어났음을 알게 한다. 비잔티움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천혜의 항만 금각만(Golden Horn)을 끼고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오스만 1세
오스만 1세

이베리아반도를 당시 세상의 끝으로 생각한 로마인들 서쪽으로 더 이상 나갈 곳이 없어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오는 동방의 문물이 풍부한 비잔티움에 제국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비잔티움은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뿐만이 아니라 도나우강, 드네프르강 그리고 돈강을 통해 흑해로 모여드는 문물을 흡수하고 지중해로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항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 식민지였던 비잔티움에 과거 수도 로마처럼 7개의 언덕(Seven Hills)이 있는 현재의 장소에 제국의 수도다운 신도시를 건설하고 330년 천도한 후 도시 이름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라고 불렀다. 후에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추모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비잔티움 천도는 313년 밀라노에서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후 두 번째 거사였다.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됐다.

동서로마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기 전에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 새로운 로마인 동로마를, 차남인 호노리우스에게 서로마를 분할통치하도록 나누어 맡겼다. 알짜는 장남이 차지하고 이민족 침입으로 폐허나 다름없는 서로마를 물려받은 호노리우스는 동로마에 가까운 아드리아해안 근처 라벤나에 거주하면서 취미로 닭이나 치고 살았다고 한다.

야채밭이 된 천년의 동로마를 지켜낸 3중성벽
야채밭이 된 천년의 동로마를 지켜낸 3중성벽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사망 후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는 7살의 나이에 즉위하고 유능한 행정가 안테미우스가 섭정을 통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성벽을 3중으로 보강하여 413년 완성했다. 삼면이 바다인 콘스탄티노플은 이 성벽으로 훈족 게르만(코드족) 등 이민족의 침공을 버텨내 476년 서로마 멸망 후에도 1000년간 난공불락의 성이 될 수 있었다.

이스탄불을 찾아가면 거대한 돔을 이고 있는 고대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 하기야 성(聖) 소피아성당이 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 정복 이후 모자이크 성화를 회칠로 덮고 모스크로 사용됐다가 제국 멸망 후 박물관으로 지금은 다시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 하기야 소피아성당은 6세기 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축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82년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직업 군인 유스티누스의 여동생이었다. 외숙부 유스티누스는 유능한 군인으로 황실 근위병 사령관이 되면서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어 귀족이 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자녀가 없을 경우 가까운 혈연을 양자로 입양시켜 가문을 세습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여동생 부부를 설득해 어린 조카를 입양,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렀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주고 귀족의 자제로서 소양을 갖추도록 교육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가 36세 때인 518년 당시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외숙부 유스티누스가 뜻밖에 황제로 옹립된다. 그가 황제가 되는 데는 특이한 일화가 전해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고령의 아나스타시우스는 자식은 없고 3명의 조카만 있었다.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감지한 황제는 자신의 방에 의자 3개를 미리 준비해 놓고 그중 하나에 황제의 옥새를 숨겨놓았다. 황제는 조카들을 불러 아무 의자에나 앉도록 했다. 옥새가 숨겨져 있는 의자에 앉는 행운의 조카가 황제로 낙점되도록 했다. 그런데 큰 조카가 한 의자에 앉고 둘째 셋째가 경쟁하듯이 또 하나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버렸다.

자연스럽게 의자 하나가 남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옥쇄가 숨겨져 있는 의자였다. 실망한 황제는 자신의 조카 누구도 황제가 될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음 날 아침 자신의 침실에 처음 문안하는 사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운명의 아침에 근위 대장 유스티누스가 들어왔다. 황제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사망했다.

영문도 모르고 황제가 된 유스티누스는 자신이 황제에 적합하지 않은 시골 출신의 무장임을 알고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그간 학식을 연마한 조카로 하여금 보좌토록 했다. 황제의 최측근이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나이 40을 넘었는데도 결혼을 안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전차경기장(히포드롬)에서 테오도라라는 20세 연하의 천민 무희를 만나면서 한눈에 반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곰 사육사였고 어머니 역시 무희 출신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를 설득, 귀족은 천민과 결혼할 수 없는 귀천상혼금지법을 폐기하고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결혼한 뒤 2년 후 황제 유스티누스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아우그스트)에 즉위함에 따라 그녀는 황후(아우그스타)가 된다. 테오도라는 예전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뛰어난 정치 감각과 특유의 영리함으로 황제를 보좌했다. 특히 532년 일어난 ‘니카의 난’ 반란군이 혈연을 내세워 아나스타시우스의 세 조카 중 한 사람을 황제로 옹위하고 귀족들이 호응하였다. 혈연에 콤플렉스를 느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대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알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탈출, 배를 타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황후 테오도라가 “황제의 보라색 어의는 가장 고귀한 수의”라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비겁함을 꾸짖었다. 황제는 정신이 든 듯 마음을 고쳐먹고 죽기를 각오하고 수도로 돌아가 반란군을 진압, 위기를 모면했다.

테오도라 황후
테오도라 황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니카의 난’으로 소실된 구 성당 위에 거대한 하기야 소피아성당을 새로이 건축하기로 했다. 황제는 솔로몬 왕의 대성전을 능가하는 사상 유례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 건축을 지시했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로마제국 전역의 이름난 신전의 돌기둥이 뽑혀 공수됐다. 불멸의 성당은 537년에 완공되어 1453년까지 그리스 정교회 대성당이자 세계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1204년부터 60년간 베네치아공화국 등 라틴제국에 의해 일시 점령 시기에는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됐다.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는 주변에 4개의 미나레트(첨탑)가 세워지고 모스크로 사용되어 왔다. 오스만제국 해체 후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2020년부터 에르도안 현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

자신감을 얻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황실과 귀족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신분이 아닌 능력 위주 유능한 군인을 등용했다. 536년 서로마를 멸망시킨 동코트왕국의 내분을 이용,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해 서로마제국의 수도 라벤나 탈환을 비롯해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수복하는 등 동로마제국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테오도라 황후 사후 17년을 더 살았지만, 차츰 통치에 소홀하여 자기가 등용한 장군을 의심하는 등 혼란스러운 치세 끝에 자식 없이 사망한다.

동로마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페르시아 사산제국과 지속적인 전쟁, 이슬람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이집트 시리아 같은 부유한 속주를 잃고 서로마처럼 멸망의 길을 걷는다. 1071년 호전적인 셀주크 튀르크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가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고 튀르크 민족이 레반트 등 지중해 동해안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튀르크 민족의 급성장에 위협을 느낀 알렉시오스 1세는 로마 카톨릭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1095년부터 1272년까지 200년 가까이 9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그중 1204년의 베네치아공화국 중심으로 4차 십자군 원정은 전리품에 눈이 어두워 본래 목적에 벗어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60년간의 지배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십자군은 원정에 성공하고 예루살렘 왕국 등 동지중해 연안에 십자군 국가를 다수 세웠으나 무슬림에 포위된 십자군 국가는 차례로 멸망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11세

오스만 1세가 오스만공국을 건국한 후 150년 후 알렉산더 대왕을 존경하는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기회가 왔다. 서방세계의 강자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 전쟁을 하고 분열돼 있었다. 1543년 메흐메트 2세가 15만의 대군을 움직여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상대로 54일간 공성전을 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우르반 대포로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돌파할 수 없음을 안 술탄은 기상천외하게도 갈라타 언덕으로 전함을 끌어올려 금각만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수비를 분산시켜 1000년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1453년 5월 29일 함락시켜 정복자(Fatih)의 지위를 얻었다. 동로마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오스만제국은 그 후 470년간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강대국이 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은퇴 후 수차례 이스탄불을 방문하고 현지에 머물면서 종군기자가 된 심경으로 이 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취재 및 연구활동 끝에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리더십 격돌을 탐구하여 <술탄과 황제>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메흐메트 2세
메흐메트 2세

1453년 오스만제국의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동로마황제를 계승한다면서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오스만제국은 이러한 여세를 몰아 서유럽을 상대로 한 정복사업이 이어졌다. 그의 증손자인 10대 술탄 쉴레이만 1세는 동쪽으로 바그다드 남쪽으로 예멘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서쪽으로 헝가리를 점령,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포위하여 서구국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여파로 절대군주제로부터 민주혁명과 민족독립을 추구하는 세계 흐름으로 이어지고 1830년 러시아와의 크림전쟁으로 오스만제국의 국력이 쇠퇴해진다. 더구나 발칸지역의 피지배 민족의 독립 열망이 높아져 발칸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08년 오스만제국 내 청년튀르크당이 결성, 무능한 황제를 폐위시키고 메흐메트 5세를 영입, 발칸전쟁으로 잃은 고토를 되찾기 위해 호의적인 독일 제국 편에서 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가 패배했다. 1920년 연합국과 맺은 세브르조약으로 오스만제국은 앙카라를 중심으로 하는 아나톨리아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국토가 연합국에 의해 찢겨지고 수도 이스탄불은 해협 지역으로 국제관리하에 두어야 했다.

오스만제국의 분할로 동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남서부해안을 차지한 그리스왕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의 지원 약속을 믿고 이즈미르에서 앙카라로 진군했다. 오스만제국의 해체 위기에서 청년튀르크당의 케말파샤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군을 조직해 그리스 침공을 막아냈다. 승리한 청년튀르크당은 앙카라를 수도로 임시정부를 건립하고 1923년 연합국에 새로운 강화조약 로잔조약의 체결을 요구한다. 연합국은 국내의 반전여론의 압력에다 청년튀르크당에 의해 튀르키예가 안정되고 있음을 고려, 그들에게 유리한 로잔조약 체결을 허용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1차 세계대전 패배로 퇴위한 메흐메트 5세에 이어 술탄이 된 메흐메트 6세는 1922년 영국 군함을 이용해 튀르키예를 탈출, 영국령 몰타로 망명함으로써 600여 년의 오스만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됐다. 튀르키예 지인은 그날이 바로 로마제국의 완전한 멸망의 날이라고 한다. 로마는 다신교 로마에서 기독교 로마 그리고 무슬림 로마로 이어왔다면서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로마의 고토회복을 하였듯이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도 같은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자신이 로마 황제를 이어받고 있다고 하면서 하기야 소피아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전용해 사용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으면서 이름도 터키식 콘스탄티니예로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탄불은 1924년 터키공화국이 앙카라로 천도하면서 수도의 뜻이 강했던 콘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이제 100년 정도 됐다고 한다.

1936년 영불은 국제관리 하에 두었던 이스탄불 등 해협 지역을 터키에 반환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독일 등 주축국과 영미 등 연합군으로부터 참전 요청을 받았지만 1차 세계대전 패배의 트라우마로 중립을 지켜 현재의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으로 유명한 관광지는 긴 줄을 서야 입장 가능하다. 이름 있는 식당 같은 데서는 입구에서 “코레?” 하면서 우리를 허그(포옹) 하고 “브라더(형제) 브라더” 외친다. 상업 목적만이 아니다. 6.25 전쟁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병력을 부산에 상륙시켰다. 파병 규모도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5455명으로 그중 3000여 명이 전사했다.

만감이 교차된 이스탄불 석양
만감이 교차된 이스탄불 석양

15,000년 전 튀르키예 민족과 우리는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우리는 동진하여 한반도로 내려왔고, 튀르키예(중국에서는 음차하여 돌궐)는 서진하여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등 현지화하여 셀주크 튀르크를 거쳐 오스만제국을 세워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위대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는 튀르키예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터키항공을 타고 귀국하면서 기내 모니터를 통해 옛 돌궐족이 서진했던 루트가 항로임을 보고 튀르키예와 우리의 특수한 인연을 느꼈다. 2024년 국제정세는 미중의 치열한 경쟁 속에 미국의 대선, 중동의 가자분쟁, 우크라이나를 포기 않는 러시아, 북한의 끊임 없는 도전 속에 요동치고 있다. 이른바 미들파워 5개국인 믹타(MIKTA)의 일원인 우리와 튀르키예가 협력을 더욱 강화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를 맞아 인사 드리고 싶다. “메르하바(안녕하세요) 형제국가여!”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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