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97] 한일(韓日) 양국의 지정학적 유산
[유주열의 동북아談說-97] 한일(韓日) 양국의 지정학적 유산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2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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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해 2024년이 밝은지도 두 달이 지났다. 새해 첫날 오후 4시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반도에서 지진 규모 7.6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발생 직후 홋카이도로부터 규슈의 나가사키까지 우리의 동해안에 면한 일본의 서부 해안에 쓰나미(해일) 경보가 발령됐다. 해안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피했고 그 피해는 엄청나다고 한다. 새해 벽두 일본의 지진 소식은 오래전 일본에서 경험했던 지진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외교부에 입부한 후 두 번째 해외공관 근무지가 도쿄의 주일본대사관이었다. 알 듯 모를 듯한 일본 문화를 제대로 접할 수 있고 아이들에게는 일본어를 가르치고 필자로서는 대학 시절에 배우다 만 일본어를 더 닦고 활용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됐다. 주변에서 축하해 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일본은 ‘지진의 나라’라고 하면서 주의를 주는 선배도 있었다.

‘지진의 나라’ 일본에 가게 되면서 과거 미국 뉴욕에서의 유학 시절이 생각났다. 가끔 학교 신문에 이름난 교수가 떠나고 새로운 교수는 오지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다. 겨울이면 폭설이 쏟아지고 영하의 칼바람이 고층건물 주변을 휘돌아 체감온도가 뚝 떨어지는 뉴욕의 매서운 겨울이 문제였다. 나이든 원로학자들이 겨울나기가 어려운 뉴욕을 피해 따뜻한 캘리포니아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 무렵 설상가상으로 총기에 의한 범죄가 늘어나 뉴욕의 관광객이 줄어들었다. 당시 뉴욕시장이 직접 TV 광고에 나와 “You got a gun, we got rooms” 구호로 총기를 소지하면 바로 감방에 보내드린다면서 감옥의 빈방을 주르륵 보여주고 있었다.

샌앤드레이어스 단층
샌앤드레이어스 단층

갈수록 뉴욕이 캘리포니아 등 신흥 지역에 밀리자 뉴욕 시민은 “뉴욕은 지진이 없다(No Quake)”라는 구호로 뉴욕의 우위를 강조했다. 남북으로 캘리포니아는 지진 다발지역임을 상기시켰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샌앤드레이어스 호수 밑으로 지나간다고 하여 샌앤드레이어스 이름의 단층 지대는 태평양판과 북아메리카판에 걸쳐 남북으로 1,300km에 달한다. 단층의 북쪽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와 남쪽에 위치한 로스앤젤레스가 판의 운동으로 조금씩 접근하고 있어 항상 지진 발생이 우려되는 곳이다. 20세기의 가장 큰 지진으로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인데, 건물 80%가 붕괴되고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일본 역시 태평양을 두고 캘리포니아와 마주 보고 있는 환태평양지진대로 지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도쿄에 부임하여 임대아파트를 찾아 입주했다. 입주 첫날 ‘슈퍼’라는 아파트 관리인이 찾아와 지진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진이 나면 식탁 밑으로 들어가고 창문과 방문을 반드시 열어두어야 한다는 등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실감이 들지 않아 건성으로 잘 들었다고 사인해 주어 보냈다. 얼마 있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집이 흔들려 정말 지진이 찾아왔는가 생각하면서 잠을 깼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 건넛방에 잠자던 딸아이가 “엄마~”하고 자기 방에서 뛰쳐나왔다. 서울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침대가 마구 흔들리니 크게 놀랐던 것 같다.

환태평양 지진대
환태평양 지진대

대사관의 비교적 높은 층에 위치한 필자의 사무실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고 지진이 지나가는가 보다 생각하고 TV를 켜면 재난방송이 나오고 지진의 진앙지와 인근 지역의 진도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바다 근처 경우 쓰나미 유무가 보도된다.

지진이 뭘까? 사전적 의미로 지진은 지구적 힘에 의해 땅속의 거대한 암반(판, plate)이 서로 부딪치거나 뒤틀림(strain)이 쌓이게 되고 판의 밀도에 따라 뒤틀림이 늘어난 곳에 스트레스(응력)가 높아지면서 견딜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지층이 어긋나는 이른바 단층(fault)이 발생하면서 지진이 일어난다고 한다. 만일 해저에서 단층이 발생하면 해면이 융기 또는 침강하여 해일이 일어나는데 일본어로 쓰나미(津波)라 하고 그 언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1755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다시 건설된 리스본
1755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다시 건설된 리스본[사진=위키피디아]

언젠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출장 간 적이 있다. 리스본은 이 지역을 개척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이 타구스강 하구에 자리 잡은 “안전한 항구(Allis Ubbo)”라는 뜻으로 리스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리스본은 지중해와 북해 무역로의 중계지로서 번성했다. 오스만터키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1453년)한 이후에는 동서무역이 차단되어 대서양에서 가장 가까운 포르투갈 태생의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신대륙과 인도 무역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그런데 1755년 11월 1일 만성절임에도 리스본에서 200km 떨어진 대서양 해역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에 의한 화재와 쓰나미로 “안전”하다는 리스본 대부분이 파괴되고 최대 10만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리스본은 그 이후 폐허 위에 다시 건축한 신도시라고 들었다. 리스본이 대서양판과 이베리아반도 판의 경계(interplate) 지역이었기에 그러한 재난이 생겼다고 한다. 일본이 '지진의 나라'라고 불리는 것은 일본도 동남쪽으로 태평양판과 필리핀판이 유라시아판 밑으로 파고들어 침강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지진 가토”라고 부른다. 그가 조선의 함경도에 호랑이 사냥을 즐겨, “호랑이 가토”라는 별명에 다시 ‘지진’이 붙은 것이다. 1596년 조선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불화로 일본에 소환되어 오사카에서 근신 중인 가토 기요마사는 그해 9월 교토 인근 후시미(伏見)에 진도 7의 지진이 발생하자 목숨을 걸고 오사카에서 후시미로 달려가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 속에 파묻혀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구해주어 그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해를 풀고 이듬해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선 300여 척을 주어 조선을 재침케 하여 전공을 세우도록 했다.

"지진 가토"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

일본에 수많은 지진 중에 역사상 최다 10만 명의 희생자를 낸 1923년 9월 발생한 간토 대지진이 있다. 지진의 혼란 와중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당시 일본 거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무차별 대량 학살을 저지른 악명이 높은 지진이었다. 그리고 1995년 1월 발생한 한신 대지진은 고베시를 관통하는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드러눕는 대형 재해였다. 최근에는 2011년 3월 후쿠시마현 앞바다 태평양 해저에서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은 해수면의 변화로 강력한 쓰나미가 발생, 내륙 10km까지 밀려들어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원자력 발전소가 침수되어 발전기의 냉각기가 고장을 일으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됐다. 일본 정부는 발전소에서 방출된 오염수를 별도 보관해 오다가 지난해 태평양에 방류함으로써 주변 국가와 갈등을 빚고 있다.

일본에 주어진 자연에 의한 운명적 유산은 지진뿐만 아니고 태풍이라는 또 다른 재해였다. 일본에 살아보니 일본은 ‘지진의 나라’에 이어 ‘태풍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열도 남쪽으로 오키나와, 필리핀 등 아열대 저기압으로 시작된 태풍은 봄부터 시작된다. 국제기상기구(IMO)가 태풍의 고유 이름을 정하지만, 일본은 너무 많아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1호, 2호로 시작한다. 연말에 일련번호로 태풍 몇 개를 맞이했는지 알 수 있다. 태풍이 심할 때는 학교가 문을 닫고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는 등 도시 전체가 올스톱됐던 기억이 난다.

동일본 대지진시 거대한 쓰나미
동일본 대지진시 거대한 쓰나미[사진=위키피디아]

태풍이 처음 상륙하는 규슈 및 중부 지방의 피해가 가장 컸다. TV 보도를 보면 산사태는 물론 태풍이 동반한 큰비로 마을 전체가 수몰되기도 했다. 태풍의 원리는 구형에 가까운 지구의 자전축이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태양으로부터 받은 열량의 차이가 발생한다. 적도 근처에서는 태양열에 의한 에너지가 풍부하지만, 극지방 같은 고위도 지역은 열에너지가 결핍해서 열의 불균형이 생긴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열역학적 원리에 따라 에너지가 교환되는 과정 즉 대기 순환이 발생되는데 태풍은 이러한 대기 순환의 일종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인도양 남태평양에서는 태풍의 모습이 뱀이 나선형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그리스어 kyklos(회전)에서 사이클론(cyclone)이라고 부른다. 중남미에서는 마야 신화에 등장하는 바람과 불의 창조신 우라칸(Huracan)의 이름을 따서 영어식 발음으로 허리케인(hurricane)이라고 부른다. 북태평양에서는 타이푼(typhoon)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중국의 태풍(颱風)에서 전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가장 무서운 거인 타이푼(Typhoon)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우연인지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아리송하다.

도시를 할퀴고 간 태풍
도시를 할퀴고 간 태풍

일본에서는 매년 25여 회 일어나는 지긋지긋한 태풍이지만 한때 일본을 구해준 신의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로 숭배하기도 했다. 1274년 및 1281년 원 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에 원정했다. 몽골 제국군과 고려군의 연합군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규슈 근처에서 태풍을 만나 원정이 좌절됐다. 일본은 신령이 일본에 가호를 내려준 것이라고 당시 태풍을 가미카제로 불렀다. 태평양 전쟁 말기 망해가는 일본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미군의 함대에 시도한 자폭 테러 목적의 항공기 자살특공대를 가미카제라고 부르고 운영해 악명을 떨쳤다.

일본 근무를 마치고 귀국 명령을 받았다. 지난 3년간 즐겁고 좋은 일도 많아 떠나기 섭섭했지만 한편으로 더이상 지진이며 태풍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안도의 마음도 들었다. 귀국하여 사무실에 걸린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지도를 본다. 과거 그냥 우리나라를 침략한 나쁜 이웃으로 보였던 일본이었는데 마치 줌인하듯이 지진과 태풍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일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반도 쪽을 향해 안듯이 하고 있는 일본 지도를 보면 해발 3000m의 일본 알프스(고산지대)가 한반도로 진입하는 태풍을 병풍처럼 막아 주고 일본 열도는 환태평양지진대에 걸터누워 한반도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과거 일본이 백제로부터 한반도의 선진 문화와 뛰어난 인재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지진과 태풍 등 자연재해는 등으로 막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가 비교적 안전한 금수강산을 누리는 것은 일본이 자연 방어벽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어느 지인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한일
동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한일

우리나라에 지진과 태풍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경험했던 지진의 나라 그리고 태풍의 나라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것은 지구 탄생부터 주어진 한일의 지정학적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정학만으로 역사는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한일 양국이 주어진 지정학적 여건과 기반 위에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

핵전쟁도 불사할 것 같은 북한의 지속적 도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작금의 동북아 정세를 볼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정치인의 말이 떠오른다. “한일이 사이가 안 좋아도 침공해 오려는 외계인 앞에서는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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