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55] 겨울의 노래 라 보엠, 자유롭고 쓸쓸한 사람들
[홍미희의 음악여행-55] 겨울의 노래 라 보엠, 자유롭고 쓸쓸한 사람들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4.02.26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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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공연한 라보엠[사진=위키피디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겨울의 풍경은 쓸쓸하고 스산하다. 푸치니의 라 보엠은 춥고 갈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다. 보엠은 보헤미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체코라고 부르는 나라의 한 지역이 보헤미아였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았던 이 지역의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지만 막상 받아주는 곳이 없어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야 했다. 이들은 악기와 노래에 능해서 잔치에 불려가기도 했고, 재주가 좋아 고장 난 물건도 잘 고치고 이런저런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떠나고 난 동네에서는 도난 사고도 있었고 자유로운 유랑생활을 동경하여 같이 떠나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동네에 들어오면 언제라도 연애를 하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한창 나이의 딸과 아들을 가진 이들은 조심시키느라 바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와 낭만은 일반 사람에겐 견디기 힘든 배고픔과 위험함의 대가였다. 19세기에 와서 보헤미안은 사회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 문학가나 지식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푸치니에 나오는 네 명 남자들의 직업 역시 시인, 화가, 음악가, 철학자이다. 말 그대로 라 보엠이다.

푸치니는 연애 이야기의 달인. 특히 슬픈 연애 이야기의 달인이다. 푸치니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창백하고 연약해서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은 라 보엠의 미미,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며 한없이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나비부인의 초초, 사랑을 믿지 않아 문제를 풀지 못하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투란도트.

푸치니가 노래하는 라 보엠은 겨울이 배경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겨울은 특히 차갑다. 4명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가난해서 다락방에서 월세를 내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제 월세마저 내지 못하고 땔감은 물론 먹을 것도 없는 상태다. 라 보엠의 1막에서는 이들이 월세 때문에 찾아온 집주인과의 실랑이를 벌인다. 그 후 시인인 로돌프 혼자 남아 글을 쓰는데 여기에 창백하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 여자가 나타난다. 바로 이 장면이다. 이제 졸다가도 눈을 크게 뜨고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이 장면만 봐도 라 보엠의 90%는 다 본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꺼진 초를 들고 나타나 집에 불이 없다며 불을 붙여 달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로돌프가 불을 붙여 주고 그녀는 다시 나가는데, 복도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그녀의 촛불뿐 아니라 집에 있던 촛불마저 꺼진다. 설상가상으로 미미는 자기 집 열쇠를 떨어뜨렸다며 바닥에서 열쇠를 찾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상상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맞다.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 바닥에서 열쇠를 열심히 찾다가 손이 마주친다.

자코모 푸치니

이때 부르는 로돌프의 노래가 “그대의 손은 너무 차군요”라며 부르는 ‘Che gelida manina(그대의 찬손)’이다. 이에 답하는 그녀의 노래는 ‘Sì, mi chiamano Mimi(네, 다들 저를 미미라고 불러요)’이다. 이렇게 이들은 연인이 된다. 사실 로돌프는 이미 열쇠를 찾았지만 자신의 주머니에 빨리 넣고 모른 척했다는 것, 그리고 미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덤이다. 라보엠이 겨울 노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꽃필 때 미미는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라보엠은 영원한 겨울의 곡이다.

1986년 라보엠 포스터

사실 라보엠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세계의 민요를 조사하다가 받은 자료들을 다시 보면서였다. 프랑스의 학생들이 보내온 자료를 읽다가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한 프랑스의 소년은 프랑스의 민요, 또는 사람들이 많이 불러 널리 알려진 노래로 오 샹젤리제와 샤를 아즈나부르의 라 보엠을 들었다. 아즈나부르는 아르메니아 인이다. 아르메니아는 정말 가난한 나라다. 그렇지만 이들은 흥도 많고 노래도 좋아하고 인정도 많다. 그런가 하면 상술도 뛰어나 부자는 다른 나라의 누구보다도 더한 부자들이 있다.

돈을 벌러 외국으로 나간 사람도 많아 그들이 번 돈을 본국으로 송금해서 이들이 보내는 돈이 나라의 예산보다 더 많다는 슬프고도 따뜻한 나라다. 이 나라 사람인 아즈나부르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 가서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그는 영웅이고 시의 가운데에는 아즈나부르 광장도 있다. 아즈나부르 역시 아르메니아의 외교관, 대사로 임명되어 자신의 나라인 아르메니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즈나부르의 라 보엠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가난하고 아픈 젊은 날의 이야기다. 이 노래의 주인공 역시 화가다.

샤를 아즈나부르

얘기 하나 해 드릴께요. 내가 스무살도 안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그때 몽마르뜨에는 라일락이 피어있었죠. 우리 집 창문 아래까지
허름한 가구가 딸린 셋방이 우리의 보금자리였지요. 
그곳에서 우린 만났죠. 배고파 허덕이던 나와 누드모델로 연명했던 당신이 
라보엠. 그건 우리가 행복했단 뜻이죠
우리는 비록 하루걸러 끼니를 먹었지만
근처 카페에서 좋은 날이 오길 바랬죠, 
주린 배로 불행했지만 희망을 거두지 않았어요.
가끔 선술집에서 한 끼 식사의 대가로 그림을 뺏어갈 때도 
우린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읊었죠. 난로 주변에 모여서, 
그렇게 겨울을 잊기도 했어요…
어느 날 우연히 난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 갔어요. 
그곳은 더 이상 내 젊은 시절을 지켜봤던 곳이 아니었어요
예전의 화실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새롭게 치장한 몽마르트르는 슬프게 보였고 라일락도 죽고 없었어요
라보엠 그땐 우린 젊었고 열정에 넘쳤죠. 
라보엠. 이젠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말이랍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젊은 날의 아픔과 슬픔이 녹아있는 노래다. 오늘은 어려웠던 시절, 철없기까지 했던 나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들어도 좋겠다. 장갑도 끼지 말고 그냥 찬 손으로 오는 바람 맞으면서 이 노래를 들어보자. 그리고 어려웠던 지난 시간,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 시절, 그때를 잘 이겨낸 나를 위로하고 칭찬해 주자.

2017년 천안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라보엠 공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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