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㊾] 최초의 프리랜서 베토벤, 낭만 시대의 문을 열다
[홍미희의 음악여행 ㊾] 최초의 프리랜서 베토벤, 낭만 시대의 문을 열다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3.09.14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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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사진=위키백과]

(서울=월드코리안신문) 홍미희 기자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 폭력을 행사하고 아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겼다. 어머니는 아이의 교육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우울증을 앓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란 아이는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고 적응을 못하여 학교에서는 10살에 자퇴했다. 또, 17세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평생을 혼자 살면서 동생들과 조카에게는 아버지가 본인에게 그랬듯이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집착을 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살아나갈 힘은 있었을까? 인간적으로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았던 그의 이름은 ‘베토벤’이다.

그에게 닥친 인간적인 시련은 그뿐이 아니었다. 베토벤은 25세에 음악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공기가 좋고 온천이 있는 곳에서 휴양을 하라는 의사의 권유로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이사를 무척 많이 다녔는데 그 이유는 돈을 아끼는 자린고비에다, 시끄러운 이웃 때문에 작곡을 할 수 없다는 핑계에(사실 귀가 들리지 않은 그에게 이웃의 소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주위 사람들과 융화를 못하는 등이었다. 이런 집들이 현재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요양에도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자 32세에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첫 페이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첫 페이지

유서는 동생들과 조카 카알에게 쓴 것으로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다. “사람들 가까이 접근해야 할 때마다 내 비참한 상태가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플루트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도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는 목동의 노랫소리 또한 나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굴러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예술, 오직 예술뿐이다” 이렇게 그는 절망했지만 실제 그가 사망한 것은 유서를 작성한 25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장례식에는 2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음악가라는 직업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은 베토벤부터다. 그 이전의 음악가들은 귀족이나 교회에 속해서 살았기 때문에 실제적인 지위는 신하나 시종에 불과했다. 음악가 중에서도 대우가 좋아 선망했던 직업인 궁정악장조차 ‘작곡과 지휘, 오케스트라의 편곡과 조직, 황실의 예배, 그 가족의 음악교육, 궁정의 모든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음악 제공, 식사 때 여흥의 음악 연주, 행사일에 특별한 곡의 작곡, 또 그들이 휴가를 갈 때는 그곳까지 따라가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 등 많은 의무조항이 있었다. 악장이 아닌 일반 연주자는 연주뿐 아니라 시종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의 베토벤 장례 행렬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의 베토벤 장례 행렬

하이든의 경우 주인의 허락 없이는 여행도 할 수도 없었고 평생 하인의 복장을 입고 살아야 했다. ‘주인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계약 서류에 글자로 적혀 있었다. 모차르트는 교회와 귀족에게 바흐는 교회에 속하여 활동했으며 이들 역시 대주교나 교회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프리랜서가 되어 자신의 작품으로만 생활을 했던 사람이 베토벤이다. 모차르트도 레슨을 하고 작품을 팔았지만 한 번도 귀족이나 왕의 신하가 된 적이 없이 음악으로만 생계를 이어간 전문 프리랜서 음악가는 베토벤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복종의 삶을 살던 음악가들에게도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1756년에 태어나 겨우 35년의 생을 살았던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귀족의 생활을 풍자했고 ‘마술피리’에서는 이상적인 세계를 노래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망했다. ‘피가로의 결혼(1784년)’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작곡된 곡이다. 1789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1792년에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고, 독일에서는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궁정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온 세계는 새로운 사상과 어떤 폭발적인 기운 속에 약동하는 혁명의 힘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또, 영국에서 1760년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왕조와 귀족계층 대신 새로운 ‘부르주아’라는 계급을 만들고 모든 체제를 흔들어 버렸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오귀스트 르누아르)

새롭게 탄생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상류층에서는 거실에 피아노를 들여놓는 것이 유행이었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 결혼을 해야 할 여자들에게 필수교양이 되면서 피아노를 잘 가르치고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의 신분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가 1700년 즈음 건반악기였던 쳄발로를 토대로 새롭게 만든 악기다. 그는 이 악기를 피아노포르테(강약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라고 이름을 붙이고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음악가인 바흐에게 갔지만, 오르간이 신이 만든 최고의 악기라고 생각했던 바흐는 피아노를 무시하고 아예 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아노는 산업혁명이 만든 기술력과 결합하여 튼튼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로 발전했다.

에라르 피아노(왼쪽)와 브로드우드 피아노
에라르 피아노(왼쪽)와 브로드우드 피아노

베토벤은 피아노를 좋아했는데 그가 사용할 당시에도 아직 완성된 악기는 아니었다. 그가 강하게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의 선이 끊어져 수리를 하면서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베토벤은 피아노가 가지고 있는 음을 최대한 사용하여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했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피아노소나타는 피아노의 발전사와 함께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곡에 사용되는 건반의 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베토벤은 32곡의 피아노소나타를 남겼는데 초기에 사용했던 윌터(61건반)는 높은음이 적은 악기였다. 중기에 사용했던 에라르(68건반)로는 ‘발트슈타인’, ‘열정’ 소나타를 작곡했다. 말기에는 저음이 좋은 브로드우드(73건반)를 사용했는데 이 악기로는 ‘함머 클라비어’ 소나타를 작곡했다. 현재 피아노의 건반 수는 88개다.

베토벤의 생각과 사상은 이미 낭만주의의 그것이었다. 새로움. 평등함. 자유주의. 일례로 그의 3번째 교향곡인 영웅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그는 나폴레옹이 구현하고자 하는 혁명의 이상에 감탄하며 이 곡을 작곡했지만 그가 황제가 되겠다고 선포한 것을 듣고 곡의 제목을 ‘영웅’이라고 바꿨다. 우리가 Eroica(에로이카)라고 부르는 곡이다.

그러나 그는 낭만파음악가가 아니라 고전파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이유는 그의 음악이 철저하게 형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나타와 교향곡, 초기의 아름다운 ‘아델라이데’부터 30년 뒤에 작곡된 합창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질서 정연하다. 그는 고전파 시대의 문을 닫고 낭만 시대의 문을 열었다.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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