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문화人] 국악 대중화에 헌신하는 ‘작은 거인’ 김수철
[최영훈의 문화人] 국악 대중화에 헌신하는 ‘작은 거인’ 김수철
  •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 승인 2023.11.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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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여온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공연 등 문화활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독특한 견해를 자랑한다. 동아일보 퇴임 후에는 SNS를 통해 예리한 통찰을 담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문화인사에 대한 그의 논평을 연재한다.<편집자주>

봄이 오는 캠퍼스 잔디밭에
팔벼개를 하고 누워 편지를 쓰네
노랑나비 한 마리 꽃잎에 앉아
잡으려고 손 내미니 날아가 버렸네
떠난 사랑 꽃잎 위에 못다 쓴 사랑
종이비행기 만들어 날려버렸네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님찾아 꿈찾아 나도야 간다
집으로 돌아갈때 표를 사두고
지하철 벤치위에 앉아 있었네
메마른 기침소리 돌아보니까
꽃을 든 여인 하나 울고 있었네
마지막 지하열차 떠난 자리에
그녀는 간데 없고 꽃 한송이 뿐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사랑 찾아 나도야 간다

 

사진=김수철 홈페이지 캡쳐

얼마전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이 성황리에 벌어졌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였다. 3000석이 넘는 좌석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김수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그의 ‘나도야 간다’라든가 ‘젊은 그대’는 요즘 세대들도 누구나 기억하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국악에 심취한 이후의 근황은 어떤가? 대중들은 그가 무엇을 해왔는지 잘 모른다.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의 무대. 100인 연주자들이 선 무대는 위용이 대단했다. 서양오케스트라, 밴드 섹션, 서양 타악기, 국악기, 동양 타악기들이 뒤섞였다. 지휘자는 연미복 차림의 김수철이었다. 하의는 발목이 드러나는 깡충 바지였다. 지휘 도중 폴짝 폴짝 뛰며 귀요미를 연출했다.

맨손으로 100인의 연주를 지휘한 것이다. 실제로는 기획과 연출, 작곡, 편곡, 노래 아니 자금까지 1인 10역의 멀티 플레이어였다.

김수철의 음악 인생이 이미 45년이다. 첫 공연은 지각도 한참 지각이었다. 인기나 돈벌이보다는 국악에 외롭게 매달려서다.

선후배 동료들도 응원했다. 마치 KBS2 ‘불후의 명곡’을 보는 듯했다. 성시경은 ‘내일’, 화사는 ‘정녕 그대를’, 이적은 ‘나도야 간다’, 백지영은 ‘왜 모르시나’, 그리고 양희은은 ‘정신 차려’를 불러제꼈다. 청중들은 티켓 값이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이만한 대형 가수들 노래를 한 자리에서 들었으니 말이다.

공연 후반에 김수철은 직접 연주하고 대표곡들을 불렀다. 사물놀이패 원로 국악인 김덕수가 장구를 메고 나왔다. 그러자 김수철은 그 리듬에 맞춰 ‘기타산조’를 연주했다. ‘기타산조’는 전자기타로 우리 가락을 연주한 것으로, 김수철의 창발성이 한껏 빛났다.

“서양 악기로 우리 장단, 가락을 연주하고 싶었다”(김수철).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 ‘치키치키 차카차카’에 맞춰 객석까지 가세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노래하는 김수철과 함께 관객들도 발을 구르며 장단을 맞췄다. 마지막 곡 ‘젊은 그대’를 부를 때는 객석에서도 일제히 일어나 율동을 하며 합창을 했다.

김수철의 나이는 어느덧 66세. 164cm의 단구에 몸무게도 58kg이다. 광운대 통신공학과를 마친 이과생이다. 그는 1979년 작은거인 1집 ‘작은 거인의 넋두리’로 데뷔했다. 2010년 제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노래하는 그는 20대처럼 보였다. 예술은 사람을 젊게 하는 마력이라도 있는 듯하다. 여러 유명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김수철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건 본인이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 ‘못다 핀 꽃 한송이’와 ‘젊은 그대’를 불렀다.

김수철만이 100인 오케스트라의 위용을 누르고 귀를 열게 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앨범은 100만장 넘게 팔린 ‘서편제’가 유일. 국가행사들 감독을 맡고, 작곡료도 받았을 터이지만 돈은 없다. 국악 현대화를 위한 장비 구입과 공부, 앨범 제작에 쏟아부었다.

“돈 안 되는 국악을 왜 하느냐… 좋아서 하는 거고 자존심이에요. 빌딩도 재산도 없지만 제 손으로 세운 ‘음악 빌딩’은 정말 많습니다.” 이날 공연 예산만 10억원이 넘게 들었다. 그 비용 모두 김수철이 혼자서 염출했다. 저녁 유료공연에 앞서 낮에 무료 공연을 했다.

“소방관, 경찰, 환경미화원, 우편배달원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시는 분들에게 응원과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김수철이 국악의 현대화에 이정표를 세우길 바란다.

“국악이 계승·발전하도록 다리가 돼주는 역할까지가 내 몫이다. 그다음엔 의식 있는 젊은 후배들이 나타나 나의 못다 핀 꽃 한송이를 피우지 않을까.”(세계일보, 10월10일자)

“흘러 흘러 세월 가면 무엇이 될까/ 멀고도 먼 방랑 길을 나 홀로 가야 하나/ 한 송이 꽃이 될까/ 내일 또 내일.” 신명 나는 김수철의 한판 축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음악 천재’라는 칭호를 그에게 붙여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1984년에 개봉된 영화 ‘고래사냥’. 최인호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 속에서 김수철, 안성기, 이미숙이 함께 눈이 쌓인 산길을 터벅터벅 힘들게 걸어간다. 그때 노래가 김수철이 작사 작곡하고 부른 ‘별리’다.

그는 국악에 빠져들며 돈과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얻었다. 그의 ‘작은거인 2집’은 가히 불멸의 작품이다. 한국 록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작은거인은 무당, 마그마와 함께 헤비메탈이 등장하기 이전 가장 강렬한 밴드였다.

두 번째 앨범은 기존과는 상전벽해로 변했다. 일본인 녹음 엔지니어를 불러 앨범을 완성했다. 그렇게 한 장의 걸출한 록 앨범이 탄생했다. ‘황천길’과 ‘불림소리’를 만든 것도 김수철이다. 영화 ‘서편제’ ‘태백산맥’도 그가 음악을 맡았다. 우리 음악으로 ‘88 서울올림픽’과 ‘팔만대장경’ 같은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주목하는 사람은 적었다. 40년 동안 40개 음반 중 25종이 국악 음반이었다. 돈과 재능과 시간을 온통 국악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돈과 인기를 잃었다. 그는 국악 대중화에 힘쏟은 천재다.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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