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실버타운
[이영승의 붓을 따라] 실버타운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3.11.10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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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아내가 실버타운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매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너무도 진지해 마냥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언제 입주할 것인지 약속하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실버타운에 입주할 생각이 없었다. 마지못해 “골프와 문학 활동을 접게 되면 그때 한번 생각해보겠다”라고 했다. 아내가 그 대답은 입주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며 구체적인 입주 연도를 지정하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늦어도 10년 내로 무조건 가겠다고 약속 후 위기를 모면했다.

그렇게 약속한 것이 작년 3월이다. 벌써 1년 9개월 흘렀으니 이제 8년 남짓 남았다. 약속한 이상 나도 실버타운에 대한 기초상식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누가 실버타운 얘기만 하면 귀가 쫑긋해진다. 한 지인이 아파트 재개발 공사 기간 4년을 용인의 어느 실버타운으로 이사했다. 일전에 만날 기회가 있어 “실버타운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여러 가지 장점을 얘기 후 “진작 실버타운에 입주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라고 했다. 아내에게 말하면 약속을 앞당기자고 할 것 같아 비밀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내에게서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실버타운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

먼저 수도권의 규모 있는 실버타운 두 곳을 선정해 운영 실태를 파악했다. 건국대 입구 ‘더 클래식 500’은 도심의 주상복합 호텔형이고, 용인 기흥구의 ‘노블카운티’는 고급 아파트형인데 모두 국내 수준급 실버타운이다. 참고로 소개하면 전자는 세대(1~2인)당 보증금 9억 원에 월 이용료와 관리비 및 의무 식사비를 합해 500만 원 정도인데 메디컬 및 피트니스 센터, 스파 골프, 연회장, 영화관, 도서관, 오락실 등 각종 서비스가 제공된다. 입주 자격은 60세 이상(부부 중 1인)이다. 하지만 경제력 상위 1%를 겨냥한 최고급 타운이라 웬만한 사람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에 비해 후자는 도심에서 다소 멀지만 비용이 적고 환경이 좋은 장점도 있다. 어느 날 이 두 곳에 대해 아내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더니 더 클래식은 너무 비싸 우리에겐 벅차고, 노블카운티는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 외에도 갈만한 곳은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이미 수도권 실버타운 현황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내의 의지가 이토록 확고하니 나도 실버타운 입주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실버타운은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주거형태로 국가가 운영하는 복지시설과는 달리 입주자가 비용 전액을 부담하고 각종 편의 시설 이용과 서비스를 받는 개념이다. 선진국은 이미 정착되고 있으나 자식이 부모 봉양을 당연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타운 입주를 고려장으로 여겨 꺼리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인생의 핵심 과제다. 실버타운 생활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던 주거 방식의 획기적 변화이니 삶의 본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남은 내 인생을 더 만족하게 살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한 편이며, 본인이 아니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족 각자가 해야 할 일까지 혼자 하다 보니 항상 자기만 고달프게 산다. 45년 전 결혼할 때는 23세로 나보다 여섯 살이나 적어 어리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맞먹으려고 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누나인 양 한다. 부부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이다. 그런데 수개월 전 수술을 받고 나서는 마음이 무척 약해진 것 같아 요즘은 내가 아내의 심기가 어떤지 눈치를 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해외여행은 못가도 서울을 벗어나 며칠이라도 조용히 한번 살고 싶다”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 일본 온천여행이라도 며칠 다녀올까?”라고 했더니 일본보다 동해의 ‘약천온천 실버타운’으로 가자고 했다. 좋다고 대답하기 바쁘게 아내는 중요 일정을 피해 12월 중순 8일간 예약했다. 그곳은 호텔형 임대 실버타운으로 온천이 나오고 동해가 한눈에 조망되는 절경이다. 두 사람 먹고 자는 비용이 하루 15만 원이니 일본 온천여행보다 가성비가 좋으며, 8년 후 실버타운 입주를 대비한 사전체험도 되니 더욱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이번 실버타운 여행에 마음이 부풀어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모래사장을 걷고, 맑은 계곡도 자주 다니겠단다. 우리는 해물을 좋아해 동해안의 신선한 특식도 기대된다. 아내가 이번 체험에 만족하면 아마도 ‘집 나가서 단기간 살아보기’를 매년 강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사회활동이 많아 실버타운 입주가 솔직히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여성들의 여행 목적은 무엇보다 밥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내도 실버타운 입주 이유가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절실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수십 년째 삼시 세끼를 당연한 듯이 먹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너무 큰 빚을 졌다. 이번 기회에 그 빚을 일부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운전기사 노릇에 충실할 작정이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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