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⑬]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공약 이행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⑬]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공약 이행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2.0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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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박정희, 김종필 등이 쿠데타를 계획하던 시절의 국군은 10여년 전의 창설 초기와 비교하면 말 그대로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였다. 창군 당시 5,000여 명으로 출발한 것은 그렇다 쳐도, 북한의 침략을 받을 당시 10만 명 미만인 국군은 곳곳에서 출몰하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38선 지역이 아니라 남쪽으로도 많이 내려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이 탱크를 앞세우고 전면적으로 남침을 개시했다. 이어 수십만 명의 중공군도 가세했다. 국군은 전쟁 과정에서 계속 늘어났다. 55만 명(1953)을 지나 72만 명(1958)까지 늘어났다. 인구 2,500만 명에 비하면 군인의 숫자가 과했다.

군대는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질적으로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넘겨받은 미군은 동맹인 한국군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투자와 교육 차원에서 미국 연수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1년에 1,000명이 넘는 장교와 하사관들을 선발해 체재비까지 지불해 가면서 병과(兵科) 별로 미국의 군사학교 등에서 장단기 연수를 받도록 했다. 박정희 준장도 1954년 오클라호마주(州) 포트 실(Fort Sill) 미 육군포병학교로 6개월 연수를 다녀왔다. 그와 함께 미국 연수를 갔던 오정석 중령의 회고담이다.

미국인 가정에 초대되어 그들과 며칠 함께 생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 무척 놀랐습니다. 늦은 밤에 인적이 없는데 빨간 신호등에 멈춰서는 자동차, 스쿨버스가 지나가면 속도를 줄이는 자동차들을 보고 ‘아하, 사람 사는 데란 이런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기생들끼리 모이면 ‘이러다가는 친미파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하는 경계심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많은 한국군 장교들은 왜 도로에 중앙선이 있어야 하는지, 들이받힌 자동차를 몰던 장교가 들이받은 차를 몰던 부하를 왜 두들겨 패지 않고 무슨 서류에 사인만 하고 보내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3권 제12장)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역대 군 출신 대통령들만 봐도 이들은 군 생활의 적절한 시기에 다들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박정희(1917~1979)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1940~1942), 일본 육군사관학교(1942~1944)를 거쳐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1946)에서 수학했고, 준장 시절 미국 오클라호마주 포트 실(Fort Sill)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훈련과정(1954년, 6개월)을 마쳤다. 무려 4개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이나 훈련을 거쳤다. 이런 삶에서 박정희 개인의 신산함이 아니라, 식민지와 해방, 전쟁 등 그 시절을 살아간 아픔과 비애가 느껴진다.

김종필(1926~2018)은 1951년 대위로 진급한 뒤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미 육군보병학교로 연수를 다녀온다. 전두환(1931~2021)은 1958년 대위로 진급한 뒤 미국으로 연수,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의 특수전학교,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레인저스쿨 등을 수료했다. 노태우(1932~2021)는 전두환과 함께 195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의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를 수료한다.

이들은 미국에서 군사적인 내용을 배우지만, 학교 밖에서 더 많이 배우고 느낀다. 어쩌면 미국이 목적하는 것이 이것인지도 몰랐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 조국과 가정의 소중함, 질서의 유지와 법규의 준수 등은 겪거나 생활하지 않고 학교에서만 배우기는 무척 어렵다. 생활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어울려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애국심(愛國心)은 이런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미국인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포트 실(Fort Sill) 기지에 전시된 원자포 M-65. 이 원자포는 박정희가 연수 가기 직전인 1953년 실제로 400kg 가까운 소형 핵탄두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포신 26m, 사거리 30km인 이 원자포는 북한군의 침략을 초전에 박살 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도 4문이 배치돼 있었다. 그러나 이 원자포는 방사능 피폭 등을 고려하지 않은 아주 위험한 무기였다.

4월 혁명 뒤 실시된 제5대 총선에서(60.7) 민주당은 “미국 원조의 대부분이 군(軍)으로 들어가니, 군인을 줄여서 남는 재원을 경제개발로 돌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20만 감군(減軍)’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에 대해 한국군은 물론 미국 측도 반대했다. 20만 감군은 결국 12월에 가서 1,534명의 군인을 줄이는 선에서 끝나버렸다. 감군은 흐지부지됐지만, 군부는 ‘감군공약’을 내건 정부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다. 소장파 장교들은 끈질기게 정군(整軍), 군의 정화를 요구했다.

1961년 516쿠데타의 주역이 된 육사 8기는 1948년 12월에 입교해 6개월의 교육을 받고 1949년 5월 소위로 임관된다. 동기생은 1,263명으로 아주 많았고 이 밖에도 특별기라고 해서 600여 명이 더 임관된다. 국군이 창설된 초창기여서 많은 군 간부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고 이를 헌법 전문 등에서 인정했으나, 국군은 독립군 출신보다는 일본군이나 만주국 출신 장교들로 짜인 현상이 있었다.

그것도 위관급 이하의 젊은 장교들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다. 독립군 출신에 대한 견제는 당시 군정을 펴던 미군의 영향으로 보인다. 미 군정 당국은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는 독립군보다는 일정 기간 교육이나 훈련을 마친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 젊은 장교들을 선호했다. 미 군정당국은 국군의 창설을 위해 육사 1~6기까지를 정부수립 전에 임관했다. 1948년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육사 7기 이하 장교들이 배출된다.

315부정선거가 원인이 돼 폭발한 4월 혁명의 결과 제1공화국이 해체되자, 군에서도 군내에서 부정선거에 가담 또는 지시한 군 수뇌부와 부정부패에 심하게 오염된 군 장성 등에 대한 정군운동이 일어났다. 1960년 5월 8일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8기생 중령 8명이 정군 연판장을 제출하자는 움직임을 보인데 이어, 새 정부 출범(8월 23일) 이후 이들은 다시 정군운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8월 29일 정군 대상자인 최영희 중장이 합참의장 자리에 임명되자, 다시 정군 운동에 나선다.

이와 관련된 중령 16명이 하극상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나중에 김종필 석정선 등 두 중령은 이와 관련해 예편된다. 거듭된 정군 요구가 좌절되자 육사 8기생 일부가 쿠데타를 결의한다. 이들이 1960년 9월 10일 현석호 당시 국방장관 면담이 불발된 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쿠데타를 결의한 음식점이 명동에 있는 충무장이고, 여기서 “충무장의 결의”라는 말이 나왔다. 그 무렵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공관에서도 내부적으로는 당시 민주당 정부의 국가운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민주당 정권으로서는 부패한 한국 정치와 파국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어 렵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에 주재했던 서방 외교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들은 한국사회가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어 있고, 이를 민주당 정부 스스로 극복할 능력이 없다고 인식했다.(권오중, 『5.16군사정변의 원인』, 자유기업원, 2018)

주한 미국대사관도 쿠데타 초기 국민의 자유로운 투표에 의해 정당하게 설립된 정부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원칙적인 성명을 발표했지만 “장면 정부의 무능, 정치와 언론의 부패 그리고 실업률과 광범위한 빈곤으로 인해 공산화의 위험이 있다”(1961.6.9)고 입장을 바꾸기에 이른다.

당시 주한 독일대사관은 “정치적 분열, 경제 상황의 악화, 화폐 가치의 지속적인 하향 조정 그리고 증가하는 실업률 등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은 팽배했고, 민주당 정권은 이미 국정을 이끌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1961.3.9)고 보고했다. 부정부패, 경제적인 후진성, 집권당의 무능 등은 세계 여러 후진국들이 당면한 문제들이었다.

5.16 군사정부(1961.5~1963.12)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다른 말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사혁명[쿠데타] 주체세력이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 비상조치로 설치한 최고통치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꿔서(5.18),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행사했다. 근거 법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보다도 기구가 먼저 생겼다.

쿠데타 석달 후(8.12)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권 이양에 앞서 진정한 민주 정치질서를 창건하고 구악(舊惡)의 재발 방지를 위해 ①구악 일소와 법질서 확립 ②모든 체제의 개혁과 발전 ③종합경제5개년 계획의 추진 등의 기초 결업을 완수한 후에 1963년 중에는 정권을 민간 정부에 이양한다“고 밝혔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들이 첫 회의를 마치고 청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1961.5.20).

군사정부는 제일 먼저 급진 좌익세력의 검거에 주력했다. 쿠데타의 성공과 군사정부 지도부에 대한 미국 등의 의구심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컸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가입자, 혁신정당 관련자, 교원노조 운동가 등 약 4.000여 명이 체포됐다.

또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4,200명의 폭력배를 포함해 2만7,000명의 범법자가 단속됐다. 자유당과 결탁했던 정치깡패 이정재 등이 여기에 포함됐고, 부패공무원 4만여 명이 공직에서 추방됐다. 이는 전체 공무원의 18%에 해당했다. 부패공무원에 가운데는 축첩(蓄妾)이라는 아주 민망한 구습에 젖은 공무원도 있었다. 전쟁 직후라는 특수하고 슬픈 상황도 있었지만, 축첩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고약했다.

군사정부는 또 자유당 정권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주요 기업가 15명을 구속하고 부정축재 기업인 27명에게 475억환의 벌과금을 부과했다. 6월에는 화폐개혁도 실시했으나, 본래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고, 혼란만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화폐를 10대 1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숨어있는 민간 부문의 자금을 산업자금으로 돌릴 의도였으나, 나라가 가난한데 민간인들 어디 감춰둘 돈이 있었겠는가? 경제가 오히려 어려워지고 미국 등에서 사전 협의 없이 통화개혁을 했다고 섭섭한 소리만 들었다.

혁명정부는 또 농어촌의 고리채(高利債, 비싼 이자로 얻은 빚)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고리채를 정리했으나, 농어촌의 사금융이 마비되는 부작용이 발생해,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한 돈을 빌리느라 더 힘들어했다. 은행이라고 있었으나, 여기서도 서민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 뒤로도 미국은 한국에 제공하는 막대한 원조를 무기로, 군사정부에 대해 민정이양 약속을 지키도록 계속 체크하고 압박한다. 쿠데타 직후 해산됐던 정당·사회 단체에 대한 규제가 차례로 풀렸다. 정치규제자의 해금 조치도 나왔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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