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⑩] NYT “미국, 쿠데타에 반대”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⑩] NYT “미국, 쿠데타에 반대”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1.1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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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다시 쿠데타 당일, NYT가 게재한 또 다른 기사다. NYT는 이날 “한국 정부 군부 반란으로 전복: 미국, 쿠데타에 반대”(South Korea Rule Seized As Armed Forces Revolt: U.S. Opposes Junta Coup) 라는 제목 아래 8개의 기사를 실었다.

미국, 쿠데타에 반대

(워싱턴, 5.16) 한국의 쿠데타는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고 미국의 책임 있는 관리들이 오늘 밝혔다. 이 관리들은 장면 정부에 대한 주한 미국 관리들의 지지 성명은 본국의 전적인 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당국자들은 쿠데타군의 부대 복귀를 호소하는 매그루더 사령관의 성명을 지지하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성명은 워싱턴의 동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휘하의 군에 대해 장면 정부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이러한 지시가 예하 한국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워싱턴의 관리들은 주한 미군이 한국군의 쿠데타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와 경제원조는 근년에 들어 규모가 커졌고 결국에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이 이번 쿠데타 때문에 한국에 대한 원조 철회를 고려하는 징후는 없다.

미국 정부는 13개월 전에 발생했던 한국의 위기 상황에서도 확고한 입장을 견지한 바 있다. 그 당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 대한 비판을 직접 쏟아부었다. 미국의 그러한 행동은 이 대통령의 사임에 큰 영향을 끼친 요인 중 하나가 됐다. 당시 크리스찬 허터(Christian A. Herter) 국무장관은 워싱턴 주재 양유찬 한국 대사를 초치해, 학생 시위대에 대해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진압 조치들’에 대한 심각한 견해를 전달했다. 서울 주재 월터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 미국대사는 국무성의 이러한 견해를 이승만 박사에게 직접 전달했다. 허터 국무 장관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이러한 방식은 드문 일로서 실제적인 개입 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졌다. 허터 국무장관은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국 의 국내문제이지만 미국은 한국의 후원국이고 또 친구, 원조 지원국, 동맹으로 서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론적으로 한국군은 “작전과 행정”에 있어 유엔군사령부의 지휘 아래 있다. 이 논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미 육군 대장 매그루더 유엔 군사령관은 쿠데타에 동원된 한국군에 대해, 부대로 복귀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 서울에서 쓴 기사는 ‘서울에서 교전’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인데, 마치 서울에서 쿠데타군과 이를 저지하는 장면(張勉) 정부측 군경들 사이에 시가전이라도 벌어진 듯한 제목과 기사다. 아마 혁명군에 포병(砲兵)이 참가했다는 데서 나온 일종의 추측이 포함된 기사로 보인다.

5.16 쿠데타에 가담한 전차가 서울 시내에서 이동하고 있다.(1961. 5. 16.)

쿠데타군 계엄령 선포, ‘주요 도시 모두 장악’ 발표

(서울, 한국, 화요일, 5.16, UPI) 한국 군부는 오늘 쿠데타를 일으켜, 격렬한 시가전 끝에 저지선을 뚫고 미국과 우호 관계를 다짐하는 반공 군사정권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쿠데타 발생 직후 미국은 한국민이 선거로 구성한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쿠데타 지도부는 16일 오전 서울 시내 곳곳에 전차를 출동시켰고, 장면 총리는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앞장선 쿠데타군은 새벽 3시 30분 부대에서 출발해 기관총과 박격포 야포 등으로, 저지하는 경찰을 제압한 뒤, 오전 6시 한국의 모든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윤보선 대통령을 관저인 청와대에 연금했다. 경찰 소식통은 장 총리와 모든 각료들이 체포됐으며,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말했다.

16일 새벽 모든 정부 청사와 주요 도로의 길목에는 군인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목격자들은 쿠데타군과 경찰이 시가지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였으나, 이 교전으로 인한 희생자에 관한 확인된 보도는 아직 없다. 미확인 소식통들은 5~6명의 경찰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한국 내 다른 도시에서의 교전에 관한 소식은 없으며, 16일 오전 내내 평온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군은 전국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쿠데타군은 다른 중요시설과 함께 전화국을 우선적으로 점령했다.

새로 설치된 군사혁명위원회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의장을 맡았다. 혁명 위원회는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정부 내 부정부패를 소탕하며,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며,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북한과의 통일 노력을 계속하고 공산주의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하겠다는 내용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모든 국민은 한국을 떠날 수 없으며, 국내선 운항도 중단시켰다. 군 장교들이 각 시·도의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고 일체의 공적·사적 모임이 금지되고 저녁 7시부터 아침 5시까지 통금이 실시된다. 내·외신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에 대한 검열도 시작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내에서 가끔 총성이 울렸는데, 대부분의 총성은 새로운 교통 통제지시를 따르지 않는 운전자에 대한 경고용으로 발포된 것이다.

쿠데타의 실세는 제2군 부사령관인 히박궁(Hi Pak Kung, ‘박정희’의 오기로 보임) 육군소장이다. 해병대와 공수부대 병력이 서울의 중심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며 육군은 한강 이남의 서울 외곽에 배치돼 있다. 군인들은 국회 앞과 외교부 청사 앞의 교통을 통제했고 청사 4면은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다. 헌병들은 일부 사복을 착용한 채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서울 시내 건물들의 유리창이 새 벽의 교전 때문에 일부 깨진 상태며, 서울역 근처의 한 경찰서는 수류탄의 폭발로 심하게 파손됐다.

서울에서 일반 시민들은 별일 없이 출근을 하고 있으나, 공무원들은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경찰 소식통은 장면 총리와 각료들은 서울 도심의 덕수궁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은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은 현재 관저인 청와대에 연금돼 있으나 신체에 해를 당하지 않았으며, 청와대 안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영 라디오방송은 혁명군이 국회와 다른 정부 청사들, 라디오 방송국과 전신전화국을 접수했다고 전했다.

작년 8월 장면 정권이 출범한 뒤 군부는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기는 했지만, 쿠데타가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져, 서울 시내 대부분은 조용하다. 총성에 깨어난 목격자들은 선두 병력인 해병대가 기관총과 박격포, 야포 등을 동원해 저지선을 돌파한 뒤 신속하게 정부청사 등을 접수했다고 말했다.

새벽 5시 혁명군 지도부는 자신들이 서울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한 시간 뒤 라디오 방송은 전국의 모든 주요 도시가 혁명군에게 장악됐다고 전했다. 혁명군의 지도부 가운데는 보병 30사단장 이상국 준장, 국방대학의 장송호 준장, 1960년에 예편한 해병대 김공하(Kim Kong Ha, ‘김동하’의 오기로 보임) 장군, 보병 5사단 장 채녕(Chai Nyung, ‘채명신’의 오기로 보임) 준장,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 등이다.

매그루더 주한 유엔군사령관 겸 미군사령관은 비상 참모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모든 주한 미군이 영내를 벗어나지 말고, 쿠데타와 관련된 사안에 일체 관여를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매그루더 장군은 휴전선을 지키는 유엔군 병사들에게 자체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는 등 한국 내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과 미군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지시했다. 휴전선은 서울 북방 30마일 거리에 위치하며, 한국내 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 공산 북한은 군사적 도발을 하곤 했다.

5.16쿠데타는 학생들이 이승만 정부를 타도한 ‘4월 혁명’ 1년 뒤에 발생했다. 이 혁명으로 한국 전역에서 최소 183명이 목숨을 잃고 6,250명이 부상했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부 내의 부패와 선거부정에 항의해 시위를 벌였다.군사혁명위원회도 오늘 장면 정부가 부패했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부패하고 무 능한 정치인들을 더는 믿을 수 없다”고 혁명공약에서 밝혔다. 쿠데타 지도부는 부정부패가 말끔히 사라지면 “권력을 책임감 있는 정치인들에게 넘겨 주갰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시한은 정하지 않았다. 쿠데타군은 또 성명에서 국민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안정과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NYT가 쏟아낸 기사 가운데는 틀린 내용도 있고, 중복된 내용도 나오고, 흘러다니는 소문을 바탕으로 쓴 부분도 눈에 띈다. 역설적으로 일부 틀리고 다른 내용이 섞인 보도 내용이 군사혁명 초기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한국 내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사안이지만, 외국 언론을 살피는 이유는 우리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들은 어떤 시각을 가졌고, 그 시각으로 쓰인 기사는 미국 독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됐을지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窓)이다. 우리의 창과 그들의 창을 통해 같은 사안을 살펴보면 더 진실(眞實)에, 진상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 때문이다. 5.16 쿠데타 발생에 많이 놀란 미국 언론은 발생한 다음 날에도 많은 기사를 쏟아내며, 사태를 분석하고 더듬거리며 주모자와 그 실체를 확인하려 애쓴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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