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⑭] 박정희,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했구나”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⑭] 박정희,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했구나”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2.09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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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위기에서 기회를 보면 기업가(企業家), 위기에서 어려움을 보면 전문가(專門家)’라고 했다. 이 말을 인정한다면 쿠데타 주도세력은 전문가보다는 기업가에 가까웠다. 혁명공약에서 밝혔듯이 이들은 수천 년 내려온 가난을 끊어 내고, ‘조국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행동계획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실권을 잡자마자 바로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을 신설하고(61.7)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실행에 옮긴다. 박정희는 5.16 거사 후 나라 살림의 실상을 파악하고는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했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마치 도둑맞은 폐가를 인수한 것 같았다’고 본인은 정권 인수 소감을 실토한 바 있지만, 진심으로 빈털터리 나라였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아무리 눈을 씻고 좌우를 살펴도 본인에게 용기를 주는 낙관이나 희망은 도대체 찾을 수 없는 완벽하게 텅 빈 집이었다. 누적된 부패는 본인으로 하여금 마치 쓰레기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안겨줬다. 이런 데서 이제껏 살아온 것이 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기파랑, 2021)

그 무렵 우리나라의 실상은 「절량농가」와 「원조경제」라는 두 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해마다 봄철이면 국민 10명 가운데 2명이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야 했고, 외국(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새해 예산안을 짜지도 못하는 진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상황인데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국민들이나 그런 나라를 살리려 드는 미국이나, 모두 대단했다.

권력은 총으로 잡을 수 있지만, 정치나 권력의 유지는 총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난한 국민은 총보다, 끼니를 더 무서워했다. 당시 봄만 되면 먹을 것이 없어서 얼어붙은 산야에서 쑥이나 봄나물이 언제 나오나 지켜보는 농민이나 도시 영세민이 많았다. 신문에는 해마다 굶어 죽는 가정의 슬픈 이야기가 실렸다.

두메마다 구비쳐 도는 ‘절량의 바람’은 충남 서천군 영리 부락을 스쳐 현송준(44 세)씨 집 세 식구(현송준, 현씨의 처 송씨, 생후 18일 된 젖먹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마을 사람들의 ‘굶어죽었다’는 진단만으로 매장허가도 없이 흙으로 돌아간 이 들 세 식구의 죽음을 당국에서는 병사(病死)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인술이 미칠 리 없었고 그의 시체엔 사망진단서가 붙을 수 없었다.(남정욱,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현대사』, 시대정신, 2014)

1960년 3월 전국 절량 농가(먹을 곡식이 없는 농가)가 정부 통계로 43만 가구, 농업전문가들 추계로는 90만 가구가 넘는다는 기록을 보면 춘궁기(春窮期, 보릿고개)의 실태가 짐작이 간다. 그때는 가정마다 아이들이 보통 5, 6명이었으니, 2,500만(1960) 국민 가운데 20% 정도인 5백만 명 정도가 배를 곯았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장면 전 총리의 경우는 7남 6녀 중의 5남으로 태어나 자신은 6남 3녀를 두었다. 박정희는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 대통령은 두 차례의 결혼에서 4명의 자녀를 가졌다. 김대중은 3남 1녀 중 장남이었고, 자신도 3남 1녀를 두었다.

가난과 배고픔을 상징하는 ‘절량 농가’ ‘춘궁기’ ‘구호 양곡’ ‘장리(長利)쌀’ 등의 용어는 지금은 학술논문 등에서는 나오지만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지난 50년 사이 이런 용어로 표현할 상황이 나라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절량 농가’는 가을에 추수한 곡식이 그 이듬해 보리가 미처 여물기도 전 봄철에 바닥이 나, 3~5월에는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농가를 말하고, 이들이 맞는 눈물과 배고픔으로 가득한 봄(春)을 ‘춘궁기’라고 했다. ‘구호양곡’은 굶는 이들에게 정부가 무상으로 나눠 주거나 빌려주는, 보리쌀이나 밀가루를 말하는데, 이것도 미국에서 원조해 준 것이다. 사정이 이처럼 어렵다 보니 양식이 떨어진 농가에서는 봄에 쌀이나 보리쌀을 꾸어먹고, 가을에 이자로 50%를 보태서 갚는, 고리(高利)의 ‘장리쌀’도 없어서 난리였다.

1950년대에 걸쳐 농촌인구는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다. 그런데도 농업이 국민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지나지 않았다. 농촌인구의 상당 부분은 생산성이 매우 낮거나 제로인 과잉노동력이었다. 무엇보다 그 과잉인구를 빨아들일 수 있는 큰 시장이 국내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같은 제약은 1960년 대에 들어와 한국경제에 커다란 수출시장이 열리면서 해소되었다.(이영훈, 『대한민국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기파랑, 2013)

해방-분단-전쟁으로 한국은 아주 어려웠다. 한국은 미국과 유엔의 원조로 부흥에 성공했다. 외국의 식량 원조로 우유 급식을 받는 학생. 1959.

쿠데타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를 반기는 국민들도 적지 않았다.

1961년 대한민국은 5.16을 특별히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5.16 직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4.19와 5.16은 동일한 목표를 갖는다”면서 5.16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규정했다. 이른바 재야의 목소리도 비슷했다. 월간 『사상계』의 편집인 장준하는 “우리는 혁명에 임하여 반성해야 하고,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면서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의 길잡이로, 모범이 될 것”이라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남정욱,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현대사』, 시대정신, 2014)

이처럼 바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쿠데타 지도부 앞에 놓인 한국의 현실은 그만큼 암담했다. 총으로 쌀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 국민들을 오래 굶게 버려둘 수는 없었다.

원조경제 시절의 실상

1950~60년대 우리 경제를 원조경제(援助經濟체제라고 한다. 나라는 가난했고 국민들은 배를 곯던 시절이었다.

1957년 한국의 수출은 총 2,220만 달러에 불과했다. 수출의 대종품은 쌀, 텅스텐, 김 등의 농수산물과 광산물이었다. 1950년대 한국은 그가 보유한 1차 자원을 팔아 약간의 달러를 벌 뿐이었다. 그에 비해 그 해 한국의 총수입은 4억4,220만 달러나 됐다. 그 가운데 한국 정부가 자력으로 결제할 수 있는 수입은 6,82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3억7,400만 달러는 미국이 제공한 원조 달러로 결제됐다. 이처럼 원조가 총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5%나 되었다.(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기파랑, 2013)

미국에서 도착한 원조물자가 부산항에서 작은 선박으로 옮겨지고 있다(왼쪽). 원조 식량은 시민들에게 직접 배급됐다. 1950년대.

진짜, 이건 나라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했다. 다른 역사학자의 기록을 하나 더 살펴보자.

미 군정은 남한을 통치한 3년 동안에, 점령지역행정구호(GARIOA)원조의 일환으로 총 4억 1천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했는데, 그중 식료품이 41.6%였습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성립하면서 미국의 원조는 경제적 안정을 돕기위한 ECA 원조로 바뀌었습니다. 또 6.25 전쟁 발발 후에는 전후 복구를 위한 UN 명의의 UNKRA 원조 등에 이어 미국의 FOA원조, ICA원조, PL480호 원조 등이 제공됐습니다. 증가 추세에 있던 미국의 원조는 1957년을 정점으로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로 점차 줄어들어 차차 유상차관 방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승만 정권기의 경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원조경제체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5년부터,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기 전해인 1961년까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총 원조액은 약 31억 달러였습니다.(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

원조는 여러 가지였다. 점령지역행정구호(GARIOA: 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는 2차 대전 직후 실시된 미국의 점령지역 정책의 일환으로, 2차 대전 전 추축국에 의해 점령됐던 국가 중 빈곤한 국가에 제공된 민생구호용 긴급원조를 말했다. ECA원조는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집행한 국무성 경제협력국(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한국은 비(非)유럽국가였지만 1948년 12월 한미원조협정의 체결을 계기로 이 원조를 받았다. UNKRA 원조는 1950년 12월 제5차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해 설치된 유엔한국부흥기관(UN Korean Recontruction Agency)이 주관한 원조로, 휴전 이후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돼 문경 시멘트공장, 충주 비료공장, 인천 판유리공장 등이 건설됐다.

FOA 원조와 ICA 원조는 이 원조를 집행한 기구의 이름을 딴 것인데, 1951년 10월에 제정된 미국의 상호안전보장법에따라 제공된 원조이다. 대외활동본부(FOA:Foreign Operations Administration)와 국제협력국(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은 경제협력국(ECA)이 행정부에 따라 바꾼 이름으로 역할은 대동소이했다. PL 480호 원조는 미 공법(Public Law)에 따른 것으로 미국 내 잉여농산물 재고 처리와 그것을 통한 대외군수물자 판매를 주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우리가 원조경제 체제일 때, 미국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한국을 방문해 다음 해의 원조액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절차가 있었다. 미 행정부도 마구잡이로 의회에 예산을 요청할 수 없었을 테니, 필요한 절차였다. 1960년도 예산을 협의하기 위해 더글러스 딜론(Douglas Dillon, 1909~2003) 국무부 경제담당차관이 서울을 찾았다(59.10.23).

한국, 딜론 차관에게 시급함 강조

(서울, 한국, 10.23) 더글러스 딜론 국무부 차관은 사흘 동안의 타이완 방문을 마 치고 오늘 한국에 도착해, 한국 관리들로부터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계속 돼야할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국 정부는 한국의 경제 상황과 1960~1961 회계연도에 필요한 2억2,200만 달러의 최소 원조 요구액을 담은 메모를 딜론 차관에게 전달했다. 미국 원조의 최대 수혜국인 한국은 올해, 요청한 것보다 휠씬 줄어든 규모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미국개발차관기금(USDLF)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자금지원과 함께 공법(Public Law)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 원조의 증액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은 또 지난 9월에 발생한 태풍(사라호) 피해 복구를 위해 필요한 1,400만 달러가 넘는 특별지원자금의 조기 집행을 메모에 담아 전달했다. 딜론 차관은 내일 휴전선을 방문한 뒤, 일요일 일본으로 출발한다.(NYT, 1959.10.23.)

태풍 사라호는 1959년 9월 17일(추석) 한반도의 남부를 덮쳤다. 이 태풍은 한국에 피해를 준 태풍 가운데 최악의 태풍으로 사망 849명, 부상 2,533명, 실종 206명, 이재민 37만여명을 발생시켰다. 그 외 선박 11,704척이 침몰하고 주택 1만여동, 농경지 침수 20만 정보 등 피해액은 당시 금액으로 1,662억 원이었다. 그 무렵 한 해 예산이 400억 원에 불과해 4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피해를 낸 최악의 태풍이었다.

쿠데타 지도부가 혁명공약 제4장에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라고 괜히 말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와 배곯는 국민’, 이 가난의 문제는 당시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21세기인 지금도 가끔 언론에서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무연고 죽음’ 또는 ‘방치된 이웃’ 등과 같은 보도가 나오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가난과는 거리가 멀다. ‘관계의 단절, 소외, 복지제도의 그늘’ 등 달라진 인간관계와 세상의 모습을 증거해 주는 측면이 짙다. 소외나 단절로 인한 이런 슬픈 일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지금도 부자 나라인 미국에는 우리보다도 노숙자(Homeless)가 훨씬 많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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