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수의 문화칼럼] “봄비를 기다리는 마음”
[안영수의 문화칼럼] “봄비를 기다리는 마음”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총장
  • 승인 2017.03.0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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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IGSE) 총장.

얼음이 녹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다. 자연은 어김없이 순리대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데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매서운 탄핵의 바람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있다. 조만간 탄핵이 인정되든 기각되는 결정이 날 테지만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반쪽이 난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내우내환에 시달리는 나라를 이끌 정신적 지도자가 부재한 이 시대에 우리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아침 신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울증뿐만이 아니라 각가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문득 30여 년 전 미국에 몇 달 체류하는 동안 살면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1988년 1월 필자는 안식년을 얻어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으로 떠났었다.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 때문에 숨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연구 목적보다는 혼자 있고 싶어서 신청했다.

가정과 육아, 강의, 연구, 보직 등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힘들었는데 다행히 한 학기가 허락돼 아이들이 어렸지만 혼자 떠났던 것이다.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리노(Rino)라는 카지노 시티는 황량했다. 다운타운을 벗어나면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벌판에 가시나무(sage bush)들만 듬성듬성한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다행히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공원 잔디 위에는 노란 민들레꽃들이 피어 황량함을 덜어주었다.

학교에서 공원을 가로 지르면 내가 기거하는 스튜디오 아파트가 있었는데 한 달 쯤 지나고 부터는 그 아파트에 사는 게 무서워졌다. 부엌을 공유하는 입주민들이 내 눈에는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 부엌에서 마주치면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행색이 남루해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눈빛과 말투가 무서웠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들 같아서 마주치기가 싫었다.

게다가 대학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영시 청강도 하고 가끔씩 한국역사와 문화에 대해 특강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교수들이 없었다. 모두 이혼했거나 동성애자들이라고 유학생들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학교 가는 것도 두려웠다. 한 동안 친하게 지내던 멋쟁이 철학과 여교수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서 이유를 물었더니 실어증에 걸려 정신과에 입원했다고 했다.

비정상적인 사람들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학교에서도, 아파트에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빨리 귀국하고 싶었다. 너무 끈끈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 나왔는데 이곳은 이상한 사람들의 집단 같았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미국 정신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의 저자 앨런 블룸(Allan Bloom) 교수도 미국의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가정의 붕괴와 사회적 병리현상을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귀국해 필자는 날줄과 씨줄과 직조된 옷감처럼 정(情)의 실로 수평, 수직으로 연결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건강하다는 글을 대학신문에 기고했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1988년 필자가 만났던 미국 사람들의 정신질환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공황장애, 트라우마 등의 용어들이 정신과 의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 과거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정신질환들이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를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은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에서 외로움 탓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중앙선데이, 2017.3.5) 가문, 지연, 학연을 중시하던 집단문화가 사라지고 ‘극단적인 개인주의’라는 바이러스가 우리에게도 번진 것이다.

젊은이들은 가족들과의 소통이 단절되고 자기만의 방에 갇혀 혼자 SNS를 즐긴다. 직장에서도 구성원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혼밥, 혼술족이 늘어나고 있다. 자식들은 노부모를 모셔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지고 노인들도 손자를 돌봐주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택하여 독거노인들이 급증한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시인 엘리엇(T.S. Eliot)은 그의 유명한 시 『황무지』에서 인간의 고립과 소외, 그리고 성적 타락으로 정신적으로 황폐한 현대인의 의식을 묘사했다. 이 시의 주인공은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메마른 뿌리를 움트게 하는/ 봄(특히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선언하고 차라리 망각의 눈으로 덮인 겨울의 마음으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

필자도 2017년의 봄이 두렵다. 이번 봄에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갖가지 대립으로 쑥대밭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국민이 이성을 되찾아 소통을 통해 대립으로 갈라진 국가를 통합할 것인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엘리엇은 433행이나 되는 『황무지』의 끝에 사막화된 현대인들의 마음에 단비를 예고하는 천둥의 목소리를 빌려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Datta’(give=주라), ‘Dayadhvam’(sympathize=공감하라), ‘Damyata’(control=자제하라).

엘리엇의 계시처럼 이기심과 개인주의로 메마르고 각박해진 우리들의 마음에 생기를 주는, 아니 분노와 광기로 갈라진 민심을 어루만져 줄 봄비를 간절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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