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51] 바로크, 음악에 창의력을 더하다
[홍미희의 음악여행-51] 바로크, 음악에 창의력을 더하다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3.11.2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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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월드코리안신문) 홍미희 기자    

바로크음악은 160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 만들어지고 연주되었던 유럽의 음악을 뜻한다. 바로크음악이 끝나는 시점인 1750년은 바흐가 사망한 해로 우리가 바로크음악하면 독일의 바흐와 헨델을 떠올리듯 바흐는 바로크음악 그 자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그러나 실제 바로크음악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의 모든 예술과 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음악은 권력과 부가 있는 곳에서 발전하는 속성이 있다. 이탈리아 음악의 중심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였다. 코렐리는 성악곡 중심이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와 다르게 합주협주곡 등 악기로만 구성된 음악을 만들고,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을 변화 있게 배치했다. 이는 비발디의 사계와 같은 합주협주곡이나 소나타 형식을 수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몬테베르디
몬테베르디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이었던 몬테베르디는 오페라 <오르페우스>를 작곡했으며 이 시기부터 귀족이나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오페라가 일반 시민에게도 관람의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비발디 역시 베네치아 음악가이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음악에서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가 생겨났고, 협주양식과 모음곡, 악기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4세 때 전성기를 맞으며 음악의 중심 무대 역시 교회에서 궁정의 방으로 이동했다. 당시 루이14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음악가가 륄리이다. 륄리는 음악보다 오히려 지휘봉과 관련된 이야기로 유명하다. 현대의 지휘봉은 한 손에 들 수 있는 가볍고 날렵한 모양이지만 옛날에는 사람보다 큰 지팡이와 같은 형태였다.

그래서 지휘자들은 지휘봉을 들고 바닥에 쿵쿵 찧으면서 단원들이 박자를 맞출 수 있도록 했는데, 지휘를 하던 륄리는 그만 무거운 지휘봉에 발을 찍히고 말았다. 궁정발레가 유행하던 프랑스에서 왕립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발레와 결합한 프랑스식 오페라를 만들었으며 루이14세와 관계도 좋았던 륄리는 허무하게도 지휘봉으로 인한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륄리
륄리

독일에서는 오르간 음악이 전성기를 맞이하며 북스데후데가 교회음악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는 뤼벡에서 활동했는데 입장료를 내고 듣는 음악회의 시초인 아벤트무지크(Abendmusik)를 운영했다. 이 음악회는 굉장히 인기가 많아서 바흐와 헨델 역시 이 음악회를 보기 위해 참석했고 북스데후데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은 사실 같은 독일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해도 똑같은 동갑내기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를 빛냈고 종결한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북스데후데는 자신의 제자가 되어 수업을 받은 헨델에게 후계자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그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헨델은 거절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음악회에 보러 와서 4달 동안이나 북스데후데의 곁에 머물렀던 바흐도 똑같은 제안을 받았으나 그 역시 서둘러 뤼벡을 떠났다.

헨델은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건너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인 오페라를 익혔다. 그는 1710년 독일 하노버 선제후의 악장이 되었는데 오페라 <리날도(‘울게하소서’라는 아리아가 유명하다)>가 런던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북스데후데
북스데후데

헨델은 하노버 악장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에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휴가를 받아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 앤여왕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왕실에서 일하게 된 헨델은 독일로 귀국하라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 말을 무시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늘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법. 바로 다음 해인 1714년 앤여왕은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이 바로 하노버 선제후였다.

사실 당시 앤 여왕에게는 하노버 선제후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50명 이상이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노버 선제후는 앤여왕 직전의 왕이었던 제임스1세 딸의 외손자로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지만, 영국에서는 가톨릭 신자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 결국 하노버 선제후가 계승자가 된 것이었다.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1세로 등극하자 깜짝 놀란 헨델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지1세가 테임즈 강위에서 연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뱃놀이를 하는 왕을 위해 만든 곡이 ‘수상음악(水上音樂, Water Music)’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헨델은 드디어 그날이 오자 자비를 들여 50명의 악단을 데리고 배에 태워 조지1세가 타고 있는 배 주변을 맴돌면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헨델<br>
헨델

연주장소가 야외였고 물소리가 들리는 강 위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오케스트라처럼 현악기 중심으로 연주하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것을 고려하여 플루트, 오보에, 바순, 호른, 트럼펫 등 관악기 중심으로 악기를 배치했고, 왕이 좌석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음악만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보니 흐름이 긴 곡보다는 짧은 곡을 여러 개 만들어서 중간부터 들어도 쉽고 편안한 곡으로 구성하여 작곡했다.

그래서 수상음악은 <수상음악이라는> 한 개의 곡이 아니고, 3개의 모음곡으로 나뉘며 이는 서곡, 에어, 부레, 알라 혼파이프 등 전체적으로 볼 때는 짧은 21개의 곡으로 구성된다. 특히 모음곡은 춤곡형식으로 만들어져 여흥을 위한 음악으로는 제격이었겠다 싶다.

지금도 이 곡들은 하나씩 따로 연주해도 전혀 부담이 없는데, 당시 뱃놀이에서도 순서가 없이 연주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왕이 탄 배의 움직임에 따라 그 배가 가까이 오면 느리고 조용한 음악을, 멀리 가면 잘 들릴 수 있도록 빠르고 큰 소리의 음악을 연주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행히 헨델의 노력이 통해서인지 조지1세는 음악에 대해 만족해했고 헨델은 다시 영국 왕실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를 떠올리면 음역이 넓어지고, 소리가 커지며, 종류도 많아지는 새로운 악기를 위해 다양한 음악을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작곡했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단조롭게 흘러가던 단선율의 시대에서 화음을 쌓고 대위법을 만들며 새로운 형식의 합주협주곡을 작곡하고 소나타 양식을 만들어가던 학구적인 모습도 떠오른다. 좋은 소리의 악기를 만들기 위해 골몰했을 스트라디바디, 북스데후데의 음악회를 보기 위해 200km를 걸어간 20세의 젊은 바흐, 이들이 만들어낸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새로운 시대의 바탕이 되었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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