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체험수기] 패와 삶, 그리고 축복(입선)
[병역체험수기] 패와 삶, 그리고 축복(입선)
  • 권순현(특수기동지원여단 112공병대대 1중대 병장)
  • 승인 2024.03.1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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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자녀들이 모국에 들어와 자원입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병무청(청장 이기식)은 이들의 군 생활 체험을 담은 수기 공모전을 2년마다 진행해 이북(e-book)으로 발간해왔다. 월드코리안신문은 병무청의 승낙을 받아, 최근 발간된 이북 <2023년 대한사람 대한으로>에 실린 우수 체험수기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권순현(특수기동지원여단 112공병대대 1중대 병장)

어떤 패에는 ‘일어남’이라고 쓰여있고, 다른 패에는 ‘잠듦’이라고 쓰여있다.
어떤 패에는 ‘자부심’이라고 쓰여있고, 다른 패에는 ‘자만심’이라고 쓰여있다.
어떤 패에는 ‘안정감’이라고 쓰여있고, 다른 패에는 ‘불안감’이라고 쓰여있다.

그리고 이 모든 패의 한 면에는 ‘콜’이라고 쓰여있고, 다른 한 면에는 ‘다이’라고 쓰여있다. 눈앞에 주어진 수많은 패 중 어떤 패를 집어 들어 우리의 삶을 향해 던지느냐 하는 것, 그보다 어떻게 던지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2022년 여름, 나에게는 ‘대한민국 군대’라는 패가 놓여있었다. 열다섯 살부터 미국에 이민 가 미국 영주민으로서 살아갔던 나에게는 한국으로 돌아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조직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 영주민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는 것, 나는 이 일이 나 자신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결국 자원입대를 신청하게 되었다.

처음 대한민국 육군으로 입대하였을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 심지어는 사람들의 냄새마저 달랐다. 오랜 기간 타지에서 생활한 나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폭파병으로 보직 편제를 받고 강원도 화천에 있는 특수기동지원여단 112공병대대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웃던 날들도 많았고 울던 날들도 많았다. 점점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편해져 갈 때 즈음 문득 내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얻고자 했던 그 무언가를 얻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고 나는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커질 무렵 미 육군 2사단과 함께하는 한미 실물폭파 합동훈련이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훈련의 핵심은 한국군과 미국군이 가진 각자의 폭파 기술로 적의 지하시설 내 두꺼운 철문을 개방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폭발물을 사용할지부터 얼마만큼의 폭약을 넣고 어떠한 방식으로 폭파할지까지, 한 달 동안의 치열한 연구와 연습이 반복되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갔고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미군, 한국군 각각 6개의 철문이 주어졌고 각 군이 폭발물을 설치하는 모습이 방호소 안에 생중계되었다. 미군들은 꿈적도 안 할 것 같던 두꺼운 철문들을 전부 날려버렸고 이제 정말 한국군의 폭파만이 남아있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됐고 우리는 외쳤다, “폭파! 폭파! 폭파!” 방호소 안에 있는 모두가 미군 한국군 가릴 것 없이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생에서의 가장 긴 3초의 정적이 지나가고 ‘쾅!’ 소리와 함께 6개의 철문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자랑스러웠다. 그 당시의 감정을 그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저 내가 해냈다는 게 자랑스러웠고 대한민국 국군이 해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모든 폭파가 마무리되고 한국군과 미국군이 서로 자유롭게 식사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익숙한 미국인들이 내심 반갑기도 하여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가 왜 한국군에 자원입대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나는 이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바로 ‘자부심’ 때문이라고…. 그렇다. 내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무언가는 바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이었다. 모든 지구상에 있는 물체는 자기중심에 따라 제자리로 기울어진다. 중심이 꼭 가운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N극은 S극을 향해 기울고, 기름은 아무리 물밑으로 부어도 둥둥 떠오르며, 돌을 아무리 높게 던져도 결국 땅으로 떨어진다.

돌이 떨어지는 이유는 돌의 고향은 땅이기에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며 결국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국에서 영주민으로서 인정받고 살았지만, 항상 허전했고 또 조금은 불안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불안정했던 이유도 스스로 무게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군대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전역이 멀지 않은 이 시점, 나는 자원입대 했다는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심을 찾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나아가려면 앞에 놓여있는 패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야만 한다. 선택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2022년 여름, 내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무수한 패들이 놓여있었고 나는 하나의 패를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대한민국 군대’라고 생각했던 패는 결국 ‘자부심’이었다.

절대로 누구에게나 같은 패가 앞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내가 삶을 향해 던졌던 수많은 패 중 가장 완벽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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