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항일유적 탐방-5] 간도의 독립운동 유적...3.13반일열사릉, 명동촌
[만주항일유적 탐방-5] 간도의 독립운동 유적...3.13반일열사릉, 명동촌
  • 길림=이종환 기자
  • 승인 2018.08.0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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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평 전 용정시문화관장이 안내..."간도는 두만강의 사이섬"
윤동주 시인 생가에서
윤동주 시인 생가에서

'간도'가 화제가 된 것은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으로 갈 때였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어머님,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는 구절이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어머니가 있던 명동촌이 북간도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버스 안에서 나오면서였다.

이날 ‘만주독립운동유적탐방’ 팀의 안내는 용정시문화관장을 지낸 이광평 3.13 기념사업회장이 맡았다. 그는 지식과 열정을 겸비한 조선족 동포 역사학자였다. 용정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용정지역의 근현대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항일운동과 관련해서는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간도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최초의 간도는 개산툰지역 두만강유역에 있는 사이섬이었다. 두만강에 홍수가 져서 두갈래 물길이 생기면서 2,000마지기 크기의 섬이 생겼다고 한다. 조선 종성지역 농민들이 이 섬으로 건너와 농사를 지으면서 간도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간도가 생기면서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차츰 더 멀리 가면서 간도도 넓어져 갔다. 청나라에서도 두만강을 건너와 농사를 짓는데 대해 세금을 받을 뿐,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기가 생겼다. 1900년 러시아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출할 때 연변지역의 청나라 통치가 한때 마비되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에서 많은 농민들이 연변지역으로 이주했다. 조선에서는 연변을 북도소와 종성간도, 회령간도, 무산간도 등 4개 구역으로 갈라 조선인을 관할하려고 했다. 1902년에는 이범윤이 간도시찰사로 임명됐다. 연변을 북간도, 그 서쪽을 서간도라고 부른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1903년 간도관리사로 된 이범윤은 조선인들이 개간하고 경작한 간도를 조선영토라고 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의 영토 시비가 일어난 것이,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청일간 간도협약 체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명동촌을 방문한 것은 '만주독립운동탐방' 닷새째날이었다. 윤동주 생가인 명동촌은 두만강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이다. 식민지 조선을 떠나 개산툰과 삼합으로 건너온 한인들이 오랑캐령을 넘어서 처음으로 닿는 한인마을이 당시 명동촌이었다고 한다.

연길을 출발한 버스는 용정 대성중학교와 용드레우물, 일본간도영사관 건물을 거쳐 명동촌으로 이동했다.구한말 용정에서 제일 먼저 생긴 근대식 한인학교는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 이동녕 등이 세운 학교였다. 숙장은 이상설, 운영은 이동녕 ·정순만이 맡아 22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나, 일제의 방해로 인해 1년만에 문을 닫았다.

명동학교는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1908년 4월 명동촌에 설립됐다. 처음에는 명동서숙으로 불렀으나 이듬해 명동학교로 바꾸고 김약연이 교장을 맡았다. 1911년에는 이동휘가 여학생도 가르치자고 해서 병설 여학교도 만들었다. 명동학교는 1925년 폐교될 때까지 1,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나운규, 문익환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광평 선생이 명동학교를 안내했다. 옛모습 그대로를 복원했다는 학교 교사는 장방형의 단층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학교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실이 있고, 당시 모습으로 복원된 교실도 있었다. 탄을 때는 교실안의 난로가 낯설었다.

학교 앞마당은 넓찍한 광장이었다. 명동단오축제를 개최하는 무대도 만들어져 있고, 그 뒤로는 명동학교 출신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돌기둥들이 서 있었다. 3.1만세운동 소식이 퍼지면서 연변에서 일어난 3.13 만세운동 기념탑도 서 있었다.

윤동주 시인 생가는 명동학교 뒤에 있었다. 생가 입구에는 윤동주 시인을 ‘걸출한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했다. 명동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셈이다.

윤동주 생가는 넓찍한 광장을 끼고 조성돼 있었다. 광장에는 윤동주가 남긴 시들이 돌과 벽에 새겨져 있었다. ‘서시’는 큰 돌에 새겨져 있어 바로 눈에 띄었다.

시를 읽으며 생가로 가서 기념촬영했다. 이광평 선생은 생가건물이 훼손돼 사라진 바람에, 복원할 때는 북한에서 집채 골조과 기와를 가져와 세웠다고 소개했다.

기자는 윤동주 시인이 거쳐갔던 동경 YMCA와 교토 도시샤대학, 시인이 수감돼 숨졌던 후쿠호카 감옥소까지 방문한 적이 있는데다, 최근 영화 ‘윤동주’까지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어서 생가에서의 감회가 각별했다.

점심은 명동촌 안에 있는 손두부 전문 음식점에서 들었다. “된장국을 주문했는데, 실수로 개장국을 준비했다고 하네요.” “그런 실수라면 환영할 만하지요." "어차피 끓인 것이니 맛이라도 보자고 하지요.” “생각지도 않게 장국도 있으니 잔을 냅시다(비웁시다).” 탐방팀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명동촌의 점심을 즐겼다.

3.13반일열사릉

명동촌을 방문하기 전 탐방팀은 3.13만세운동때 희생당한 '3.13반일열사릉'도 찾아 묵념을 올렸다. 이 능원은 용정시 인민정부 중점문화재로 지정돼 있었다.

“1919년 3월13일 연변 각지 3만여명의 군중들이 용정시에 모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시위대오가 ‘일본놈은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면서 용정일본총영사관으로 향하는 도중에 주둔군 부대와 경찰들이 시위대에 사격을 가해 14명을 사살하고 15명을 부상입혔으며, 30여명을 체포하여....”

안내판에는 이런 설명이 있었다. 당시 시위에는 용정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이광평 선생이 소개했다. 해마다 3월13일이면 용정지역 학생들과 유지들이 그날 만세시위 여정을 따라 걷고, 3.13반일열사릉도 참배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15만원탈취사건 기념비
15만원탈취사건 기념비

이날 이광평 선생이 안내한 또 한 장소가 있었다.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였다.

“1920년 1월4일 간도 국민회 외곽조직인 철혈광복단 단원 윤준희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 박웅세 김준 등 6명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용정지행으로 운반하던 현금수송대를 습격해 15만원을 탈취했다..."

유적지에는 중국어로 사건을 소개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적의 돈을 뺏어 내 총을 산다는 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단 통쾌하게 성공했다.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었던 전홍섭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불과 27일 만에 주동인물 3명이 일제 당국에 체포되고 자금도 빼았겨 버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무기를 사는 도중에 엄모라는 밀정이 밀고해버린 것이다.

“안내판에 탈취사건이라고 적은 것은 틀렸어요. 일본측 시각에서는 ‘사건’이지만 우리한테는 ‘의거’잖아요."

탐방팀의 일원인 김도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가 이처럼 말하자, 이광평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오후 탐방팀은 연길 서시장을 둘러본 후, 길림시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연길에서 길림시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걸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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