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⑥] 김근욱 짐바브웨한인회장 "가발전문매장으로 여심(女心) 사로잡았다"
[나의 해외개척기⑥] 김근욱 짐바브웨한인회장 "가발전문매장으로 여심(女心) 사로잡았다"
  • 김근욱 짐바브웨한인회장
  • 승인 2015.09.1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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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에 22개, 잠비아에 4개 매장 있어...전문점으로 시장 장악
▲ 김근욱 짐바브웨한인회장

인천공항에서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까지는 비행시간만 17시간 정도 걸린다. 보통 인천에서 두바이로 간 다음 하라레 행 비행기를 탄다. 예전에는 홍콩에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로 간 다음 다시 1시간 반을 날아 짐바브웨에 도착했다. 지하철도 아닌데 2번씩이나 환승하고 비행시간만 20시간 가까이 걸렸다.

짐바브웨에 산다고 말하면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세계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나라라고 말하면 들어봤다는 사람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바로 위의 나라로 북쪽으로는 잠비아와 연해 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일 년 내내 온화한 기온을 가진 천혜의 관광국으로 일찍이 유럽에서는 ‘아프리카의 진주’ 또는 ‘아프리카의 스위스’로 알려진 곳이다. 국토 면적은 39만km²로 한반도의 1.8배(남한의 약 4배)에 달하고 인구는 약 1,3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과 제조업 기반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어 향후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을 주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1999년 2월이었다. IMF 외환위기 때 내가 경영하던 플라스틱 골판지 회사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1년4개월간 군산교도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후였다. 보통 경제사범은 부정수표단속법에 걸리면 사기 횡령 등이 줄줄이 따라오는데, 나는 딱 부정수표단속법 한 가지로 걸렸다. 수표가 부도나면 은행은 24시간 이내에 의무적으로 고발하게 돼 있고, 그러면 즉시 구속된다. 사실 당좌수표를 부도냈다고 구속을 하는 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제도이다. 사업을 하다가 그리 된 것이니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일이라는 게 인연으로 얽힌다더니, 교도소 생활하던 중에 짐바브웨에서 잡화사업을 하던 사람을 알게 됐다. 그 친구가 출소하면 짐바브웨로 한 번 놀러오라고 해서 머리도 식힐 겸 가서 한 달쯤 이곳저곳 돌아다녔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대개 열대기후를 떠올린다. 이곳은 다르다. 우선 기후가 너무나도 좋다. 남반구여서 10월이 봄이다. 이 무렵이면 봄의 정령이 마술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도시 전체가 노곤한 꿈 속으로 빠져든다. 사실상 1년 내내 초여름 혹은 초가을 날씨다. 빅토리아폭포 등 자연환경은 더 기막히다. 밤하늘의 은하수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짐바브웨는 1980년에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의 마지막 식민지였는데,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이들 교육하기에 좋고, 주거환경도 아프리카에서는 최상위권이다.

한때 짐바브웨는 천문학적인 인플레를 겪었다. 2008년 미화 1달러에 대한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무려 200억 달러였다. 계란 한 개가 3500억 짐바브웨 달러로 1조 짐바브웨 달러를 갖고 있어도 계란 3개를 살 수 없었다. 화폐가치가 워낙 빠른 속도로 떨어지다 보니 짐바브웨 정부는 돈을 한꺼번에 찾지 못하도록 하루 인출 금액을 1000억 짐바브웨 달러(미화로 5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로 제한하기도 했다. 쇼핑 한번 하려면 트럭으로 돈을 실어 와야 할 정도였지만, 그나마 가게에 살 물건도 별로 없었다. 그때 우리 동포들은 대사관을 통해 라면과 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한국으로부터 컨테이너로 실어왔다. 화폐가치가 땅에 떨어지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연평균 물가 상승률이 220만%에 이른 적도 있다.

짐바브웨 경제는 정부가 2009년 9월부터 자국 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미국 달러화를 통용시킴으로써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일부 물가는 확실히 우리나라보다 싸다. 자동차 휘발유 1L 값이 2000년까지는 40센트이니 우리 돈으로 500원이 채 안 된다.

짐바브웨는 농축산 강국이다. 담배농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해 매년 4월 담배 경매 시즌이 되면 전 세계에서 담배상인들이 몰려와 하라레의 호텔방이 동이 난다. 백금, 금, 다이아몬드 등의 귀금속과 석탄, 니켈, 크롬 등의 광물이 많이 난다. 아직도 이곳에 다이아몬드를 노리고 오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

나는 처음 봉제시설을 들고 이 나라로 갔다. 투자이민을 하려면 10만 달러 이상인데, 그 정도에 맞춰 재봉틀 등을 한 컨테이너에 실었다. 봉제 기술자 한 분도 같이 모시고 갔다. 그런데 현지 파트너의 말이 자꾸 바뀌었다. 나는 이미 사업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인데 그 정도에 당할 리가 있겠는가? 생각 끝에 봉제업을 접고 한국인이 운영하던 잡화점을 인수했다. 우선 잡화점으로 생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인근 잠비아로 출장 갔다가 잠비아 육군참모총장인 짐쿠리를 알게 됐다.

당시 짐쿠리는 앙골라 반군(UNITA) 지도자인 조나스 사빔비와 친구 사이였다. 사빔비를 통해서 앙골라 반군에게 군수물자를 팔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기 등을 본격적으로 팔기도 전에 사빔비가 사망하고 앙골라 내전이 종료돼버렸다. 군복과 군화를 조금 팔다 만 꼴이었다.

당시 앙골라 반군들은 러시아 무기 대금으로 다이아몬드 원석을 내놓았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내가 무기를 팔아 다이아몬드 원석을 받았다면 내 인생이 또 어떻게 흘러갔을까?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잠비아에서 광산 계통의 일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은 추출 일을 시작한 것이다.

금, 은, 동은 원래 사촌간이다. 동(구리)을 제련하고 남은 슬러지에 납을 넣고 녹이면 은이 나온다. 은을 황산에 넣고 분리하면 금이 나온다. 잠비아에서 콩고에 이르는 지역을 구리벨트(copper belt)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구리 생산이 제일 많은 곳이므로 은 추출 사업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잠비아에서 무기거래와 은 추출로 7년을 보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돈만 까먹었다. 한탕 하려다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도 아프리카에 이걸 노리고 오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에 눈먼 돈 없다. 한탕 하려다 오히려 당신 눈알 뽑힌다.”고.

2003년 말, 나는 한국에 와 있었다. 새해가 밝아오면 지천명인 50 나이가 되는데,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만 아프리카에서 철수할까, 아니면 아프리카에 뼈를 묻을까? 결심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승부를 내기로 하고 한국의 사무실을 정리했다.

2004년 2월4일, 하라레 공항에 도착하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새 일을 시작했다. 가발사업이었다. 나는 먼저 아내가 경영하던 두 개의 잡화상을 정리하고, 20만 달러어치의 재고도 창고에 집어넣어버렸다. 다시는 잡화를 팔지 않고, 재고는 기부할 셈이었다.

아프리카도 7, 8월은 춥다. 아침 기온이 4, 5도밖에 안 돼 현지인들은 오리털 파커를 입고 다닌다. 그런데 흑인들은 모두 곱슬머리여서 날씨가 추우면 머리카락이 철솔(iron brush)처럼 돌돌 말려서 두피를 파고든다. 가만있으면 아프니까 예전에는 약품으로 머리를 폈는데, 요즘은 머리를 짧게 자른 뒤 거기에 가발을 땋아 붙인다. 두피 쪽으로 파고드는 모발을 가발이 밖으로 잡아 당겨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가발은 모자처럼 쓰고 벗는 통 가발과 기존 모발에 붙이는 위빙(weaving) 두 종류로 나뉜다. 통 가발 비율은 1%도 안 된다. 대개 위빙을 사용하는데 웬만한 직장 여성들은 2주에 한 번 정도 바꾼다. 위빙 가발은 한번 착용하면 머리를 감을 수가 없다. 원래 머리에다가 가발을 한 가닥 한 가닥 땋아 붙이기 때문에 머리를 감으면 다 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쓰면 냄새가 나니까, 끼니는 걸러도 가발은 갈아줘야 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발이 생필품인 이유다. 물론 생활수준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여자들이 미(beauty)에 관심을 갖게 된 영향도 있다.

가발가계는 예전에도 많았다. 내가 하던 잡화점에서도 가발을 팔았고 자전거 수리점에서도 가발을 팔았다. 그런데 가발 전문매장은 없었다. 그냥 잡화점에서 다른 물건들과 함께 취급했을 뿐이다. 보따리 장사 수준이었던 데다 유통망도 엉망이었다.

나는 유통, 즉 물류는 돈이라고 보았다. 가발은 아프리카의 주요 생필품 중 하나인데 그 물류망이 확보돼 있지 않다는 점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 저 유통망을 체계화시키면 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신제품에 다양한 제품을 구비하니 사람들이 우리 가게 ‘헤어마트(Hair mart)’로 몰려왔다.

그동안 가발생산은 중국과 레바논, 한국인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나이지리아의 린다와 케냐의 앤젤스 등 우리 동포들이 생산하는 가발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가발 유통 쪽으로 사업을 키운 건 내가 처음이다.

현재 헤어마트는 짐바브웨에 22개, 잠비아에 4개 등 26곳이 있다. 우리 매장에 오면 상품 종류도 많고, 가격도 싸고, 신상품도 가장 빨리 들어오니까 손님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다.

고객은 100% 흑인 여자들이다. 기존의 가발 가게는 손님이 물건을 고르고 점원은 돈을 받는 게 전부였다. 우리 가게 안에는 각양각색의 가발들이 사방 벽 가득 전시돼 있다. 손님이 들어오면 알맞은 물건을 추천해주고, 손님에 맞는 스타일을 제시한다.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 고객들이 홀딱 반하게 돼 있다. 가게까지 오는 교통비를 아끼려 한 번에 10개씩 사가는 사람도 있다.

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내가 한국행 리턴 티켓을 찢은 지 7년 만에 동생한테서 연락이 왔다. 비행기 표를 보내줄 테니 집에 한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내가 보고 싶은데, 돈이 없어 못 오는 것 같으니 비행기 표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아차 싶었다. 연로하신 부모님도 잊은 채 앞만 보고 달린 것이다.

짐바브웨는 현지어로 ‘큰 돌집(Great Stone House)’이라는 뜻이다. 9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는 짐바브웨 남부에 쇼나족들이 나라 이름의 기원이 된 커다란 석조 건축물을 많이 세웠고 예전 지폐에는 돌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조각 가능한 원석이 500종 이상인, 돌이 많은 나라이다.

1980년 전까지 짐바브웨는 로디지아라고 불렸다. 1888년 영국인 세실 로즈가 창립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마타벨레 왕국으로부터 광업 이권을 받아내면서, 로즈의 이름을 딴 로디지아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이 지역에 영국인들의 정착이 시작됐다. 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분쟁이 일어나 결국 마타벨레 왕국과 영국인들간의 전쟁으로 이어져 영국인들이 승리하면서 나라 이름도 로디지아로 불리게 됐다.

1923년에는 영국 연방의 자치 식민지가 되고 1953년에는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와 니아살란드(현재의 말라위)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연방을 구성하지만, 1963년 잠비아와 말라위가 독립하면서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다 1965년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전선당’이 국회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영국은 이를 위법이라 선언하고 제재를 가하였고 이웃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마저도 로디지아의 일방적인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소수 백인 지배에 대항하는 반군의 게릴라 투쟁이 심해지면서 이 나라도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결국 1979년 영국의 식민지로 복귀하고 1년 후인 1980년 4월 아프리카인이 통치하는 짐바브웨로 독립했다. 공용어는 영어, 쇼나어, 은데벨레어, 벤다어, 남뱌어, 샹간어, 칼랑가어, 수투어, 퉁가어 등이 있으나 영어 하나만 알아도 불편하지 않다. 선진국에 가면 우리가 그들 말을 쓰고 알아들어야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내가 적당히 말해도 그들이 다 알아듣는다.

나는 딸 둘을 두고 있다. 큰사위 가이 슈워츠는 독일계로 고등학교 때부터 딸아이를 쫓아다니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다. 사돈집은 원래 농장을 했다. 그런데 2002년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한 무가베 대통령이 백인들의 농장을 전부 몰수하는 조치를 취하자 뉴질랜드로 이민 갔던 집이다. 딸이 뉴질랜드 대학으로 유학 가서 다시 만난 것이다. 현재 큰사위는 나의 아내와 함께 전국 20여개 매장으로 나가는 물건 배송을 책임지고 있다.

아프리카에 사는 외국인은 50대가 넘으면 자녀들이 대개 외국으로 나가서 부부만 남은 집이 많다. 그런데 내 가게 일이 너무 바쁘니까 딸 부부가 아프리카로 컴백했다. 손주와 함께 산다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기인 것 같다.

짐바브웨의 한국인은 약 120명 정도. 경제 이민은 줄고, 대신 선교단체나 비정부기관(NGO) 관계자들이 대부분이다. 무가베 대통령의 집권이 35년째에 이르러 경제사정은 좋지 않다. 반면에 치안은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집에서 권총강도를 두 차례 만나기도 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얼마간의 현금을 준비하고 있다가 두말 않고 줘서 보냈다. 생각해보니 강도가 들어온 날은 묘하게도 경보장치가 고장난 날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공모하지 않았나 싶지만 더 따지지 않았다. 조금씩 나눠가지자는 뜻으로 이해한다.

실제로 아프리카 문화가 그렇다. 한 사람이 벌면 친인척을 포함한 온가족이 함께 나눠먹는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그곳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무가베 대통령이 35년간 장기 집권하는 것도 아프리카 문화의 일부분이라고 본다. 추장이 죽어야 다음 추장을 선출하는 부족문화의 유산이 아니겠는가.

나는 2015년 3월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상공의 날’ 기념행사에서 우리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대한상공회의소는 해마다 △모범상공인 △재외 및 교포상공인 △주한외국상공인 중에서 성공적인 기업 경영으로 타의 모범이 되고 우리 경제의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를 선정해 훈·포장 및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이중 재외 및 교포상공인은 5년 이상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자로서 △모국의 경제발전 및 수출지역 다변화에 공헌한 자 △모국의 국위선양에 공헌한 자 △ 교민사회의 발전 및 복리증진에 기여한 자 △우리나라 상품수입에 공이 있는 자 등에게 정부 포상을 실시하고 있다.

산자부가 발표한 나의 공적은 짐바브웨의 가발유통업체인 ‘소지키 패션스(SOJIKI FASHIONS)’와 잠비아 소재의 가발 생산공장인 사나그룹(SANA GROUP)을 통해 연 매출 150억 원, 종업원 420여 명의 규모로 현지인 고용창출 및 사회복지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기업에 잠비아 사업투자 절차 및 현황 등의 정보를 제공하며, 우리 기업의 아프리카 진출에 기여함은 물론 경상남도의 해외자문관으로서 경상남도의 관심 분야인 짐바브웨의 농업분야 진출을 위해 현지에서 자문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것이다.

내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이니 경상남도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영광스런 일이다. 처음 경상남도는 내게 짐바브웨에 병원을 건립하고 싶다며 자문을 구해왔다. 몇 년 전부터 정부뿐 아니라 지자체들도 여기저기에 단발성 지원을 많이 하고 있다. 또 아프리카에 병원을 지어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5,6년 지나면 병원 건물만 덩그러니 남는 경우도 있다. 의사 등의 의료 인력과 병원운영 등에 관한 소프트웨어가 지속적으로 지원되지 않으면 그동안의 지원이 허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병원 대신에 한 마을을 지정해서 3년 정도 꾸준히 지원해 짐바브웨에서 최고 부자마을로 만들어주고, 이걸 대한민국 해외지원의 롤 모델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새마을운동을 기본 골격으로 농사에 필요한 씨앗 등의 지원에서 안전한 식수공급 등 예전에 우리가 했던 농촌개발 방식을 전수해주자는 것이다. 실제로 주짐바브웨 한국 대사가 농촌지역에서 새마을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반응이 참 좋았다. 나는 이게 잘 되면 우리나라 이미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취임 후 남아공과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를 첫 순방지로 정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곧이어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일본은 1993년부터 5년마다 아프리카개발회의를 열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이 왜 아프리카에 힘을 쏟고 있는가? 이곳이 마지막 시장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인구증가율은 6% 이상이다. 현재는 10억 인구이지만, 20년 후에는 20억 명 이상이 된다. 영아 사망률과 에이즈 등 질병에 의한 사망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제성장률이 7% 이상인 나라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아프리카는 양 계층만 존재했다. 아주 잘 사는 극부층과 아주 못 사는 극빈층 두 부류밖에 없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제 아프리카에도 중산층이 생기기 시작했고, 해가 갈수록 이 중산층이 두꺼워지고 있다. 중산층이 생긴다는 것은 시장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동안 아프리카는 내전과 독재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선거를 통한 민주 정권이 하나 둘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민주화가 되면 부정부패가 줄어들고, 이는 대외신뢰도 상승에 기여하게 된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발상지이다. 그동안 세계의 중심은 유럽과 미국을 거쳐 이제는 아시아로 넘어가고 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의견이지만, 나는 아프리카도 언젠가 세계의 중심이 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한다.
자본주의 세계는 이익이 있는 곳으로 자본이 흘러간다. 지금 세계의 자본이 아프리카 말고 갈 곳이 있을까? 물론 아프리카 투자는 아직 위험요소가 많다. 우선 사회 인프라가 제대로 안 돼 있어 초기에 돈이 많이 든다. 광산 하나를 인수해도 도로나 철도, 항만시설이 제대로 안 돼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장기간 투자를 하는데 미국이나 일본의 거대자본과 게임이 될 지도 미지수다.

나는 아프리카 투자에서 우리의 주특기를 살리자고 말하고 싶다. 현재 아프리카의 생필품은 대부분 중국산이다. 중국이 아프리카 개발을 무상으로 지원하면서 원부자재뿐 아니라 인력까지 중국인으로 채우고 있다. 아프리카는 거의 대개가 식민지를 경험한 곳이어서, 앞으로는 중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이 조금씩 번지고 있다. 소득이 올라가면 질 좋은 상품을 찾게 된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길 것이다.

내 사업은 지금 뿌리 내리는 단계라고 본다. 2대 때는 잎이 나는 단계이고, 열매를 따는 단계는 3대쯤 돼야 하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뿌리 내리는 일에 몰두할 생각이다. 결코 돈을 많이 벌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현재 짐바브웨 한인회장을 맡고 있다. 한인회장을 맡으면서 아침 7시부터 우리 점포는 물론 한인 가게를 죽 둘러본다. 현지인들은 9시 반 넘어야 문을 열지만, 우리 동포들은 일찍 일을 시작한다. 어떨 때는 내가 한 바퀴 돌 때까지 문을 열지 않으면 혼을 내주기도 한다.

사업하는 사람은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매일 아침 8시 30분쯤에는 다운타운 인근 아본데일 지역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이 때쯤 되면 동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5~6명에서 많을 땐 10여 명이 모인다. ‘짐바브웨 한인회 모닝커피 사랑방’ 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얼굴을 본 뒤 하루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짐바브웨 기아대책기구(ZFHI) 고문을 맡고 있다. ZFHI는 특이하게도 이곳 한인들이 중심이 돼서 설립된 기구다. 기아대책기구는 기독교 계통의 NGO지만 이곳 ZFHI의 경우 이사진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고 있다. 나도 불교신자이지만 기독교계 비정부기구(NGO) 활동과 선교사 후원에 조그만 힘을 보태고 있다.

하라레 서쪽 25㎞ 지점 노튼 지역에는 박치영 수녀님이 짐바브웨 노튼 청소년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의 빈민 아동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데, 나는 그곳에 매분기별로 얼마씩의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큰 행사가 있으면 별도로 기부한다.

짐바브웨는 내가 잠시 머물다가 돈만 벌고 떠날 땅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두 딸과 손주 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이다. 그 땅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할 책무가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짐바브웨에도 한류 바람이 불고 있다. 2007년 12월에 방영된 <대장금>은 거의 모든 가정에서 시청하였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한 바 있다. 이후에도 <내사랑 삼순이>, <커피프린스 1호점> 등이 성황리에 방영됐다. 짐바브웨 국제영화제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출품된데 이어 <올드보이>가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짐바브웨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가고 있다. 모두 우리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는 일이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빅토리아폭포
▲ 빅토리아폭포앞에서
▲ 빅토리아폭포를 조망하는 헬기투어를 마치고
▲ 짐바브웨에서 열린 2015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 총회에 참석한 여성회장과 한인회장 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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