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94] 미·중 패권경쟁과 키신저 박사의 유언
[유주열의 동북아談說-94] 미·중 패권경쟁과 키신저 박사의 유언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0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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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사진=위키피디아]

최근 국제정치 현실에서 체제와 이념이 다른 미국과 중국의 불가피한 패권경쟁으로 우리의 각별한 생존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달 말 헨리 키신저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 100세의 고령으로 별세했다. 그는 공산 중국의 죽(竹)의 장막을 걷어내고 미중 수교를 이끌어내 중국이 오늘날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신흥대국의 지위를 갖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의 외교전략으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설계한 키신저 박사는 중국이 예상외로 빠른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든 국제질서가 위협받고 세계를 3차 대전의 불안에 빠뜨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의 하버드대학 후배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2017년 저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을 통해 미중 간 패권경쟁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상기시켰다. 앨리슨 교수는 미중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그리스 역사가의 이름을 빌려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고대 그리스 이야기를 하면 올림픽의 꽃 마라톤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마라톤은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30km 떨어진 항구도시로 기원전 490년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군이 상륙한 곳이다. 그리스군은 불시에 맞이한 페르시아 대군을 기적적으로 물리치고 전령은 승전보를 아테네에 전달하기 위해 달렸다. 이것을 기리기 위해 1896년 최초 개최된 근대 올림픽 경기종목에 마라톤이 채택됐다. 마라톤 전투는 그리스의 승리이지만 페르시아의 굴욕이기 때문에 페르시아 후예 이란에서는 마라톤이 금기 종목이 됐다. 이란은 올림픽에 마라톤 선수를 보내지 않고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이 경기종목에서 빠졌다고 한다.

아테네 및 스파르타 등 그리스 연합군은 수차례에 걸쳐 페르시아군을 테르모필레 전투 및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축출하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한 신흥강국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은 기존의 패권국 스파르타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두 세력의 갈등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져 27년간의 전쟁 결과 스파르타가 겨우 승리했지만 두 나라는 폐허가 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

필자는 외교관으로 베이징과 홍콩 근무를 통해 미중 갈등의 기원은 19세기 중반 영국에 의한 아편전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다. 1780년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에 의한 산업혁명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동력이 됐고 영국은 중국과 충돌하여 1839년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淸)과도 교역하기 위해 1792년 전권대사 조지 매카트니를 팔순 만수절을 앞둔 건륭황제를 만나기 위해 열하의 여름 궁전으로 파견했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보다 10년 후의 일이었다. 중국의 천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매카트니는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코우토우(叩頭)를 거부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영국은 중국산 차, 비단 그리고 도자기 수입이 늘어 외화(銀)가 바닥이 나서 뭐든지 중국에 수출해야 했으나 매카트니의 행동을 불쾌하게 생각한 중국은 영국과의 교역을 불허했다. 영국은 유출된 외화를 회수하기 위해 인도에서 아편을 길러 중국에 불법으로 팔았다. 마약인 아편을 금지하는 중국과 영국의 무력 충돌이 아편전쟁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명분 없고 부끄러운 전쟁이었지만, 선진 무기로 중국을 패배시키고 홍콩섬을 할양받았다.

매카트니의 영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건륭제
매카트니의 영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건륭제

아편전쟁의 패배를 시작으로 천하질서를 구가하던 중국의 치욕은 1949년 신중국 건국 시까지 100년간 계속된다. 영국은 1차 아편전쟁에 승리했음에도 교역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858년 프랑스를 끌어들여 다시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영불연합군은 톈진과 베이징을 점령하고 추가 이권을 확보했다. 그 후 1884년 프랑스는 청불전쟁을 일으켜 북베트남의 종주권을 빼앗고 불령 인도차이나를 설립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서세동점에 자극받은 일본은 유신을 통해 국력을 키워 1894년 중국과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종주권을 빼앗고 타이완을 할양받는다. 일본의 팽창은 한반도에 이어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 1931년 만주국을 건국한다. 중국대륙을 지배코자 한 일본은 1937년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아 1945년 결국 미국에 패전, 중국에서 물러난다. 중국으로서는 서양(영불)과 동양(일본)의 양방향 침탈에 만신창이가 되는 수모를 당하고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공산당과 국민당의 4년의 내전 끝에 1949년에서야 중국 공산당이 타이완을 제외한 중국전체를 되찾게 된다.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이 건국 백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이른바 백년의 대장정(大長征)을 통해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으로 부활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 마이클 필스버리는 이러한 중국의 대장정을 분석해 <백년의 마라톤>이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그는 중국이 오늘날의 국제질서하에 손자병법의 인(忍), 세(勢), 패(覇)의 전략을 구사하여 중국경제를 발전시켜 2010년에는 일본을 능가하는 G2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1차 아편전쟁

그러나 중국 건국 후 첫 30년간은 고립과 시행착오를 보였다. 1950년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에 참전함에 따라 미국 등 서방세계와 단절되어 고립상황이 됐다. 1953년 스탈린 사망과 그의 후계자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자극받은 중국의 지도부는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비판하자 소련은 중국을 공산주의 탈을 쓴 전체주의 국가로 비난하면서 두 나라 사이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갈등구조 속에 중국에서는 중국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가 조직되고 농기구를 녹여 만든 원시적 철강생산으로 2000만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한다. 이러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최고지도자 마오쩌둥 주석이 사임하고 국가주석직을 이어받은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을 폐기하고 실사구시의 경제정책을 펴면서 중국 지도부 간의 불화가 심화된다.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의 개혁이 성공하여 인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자 실각의 불안에 휩싸인 마오쩌둥 주석은 류사오치 일당을 반혁명적 마르크스 수정주의자로 지목했다. 1966년 중국 사회는 낡고 불순한 것을 청산해야 한다면서 전국 규모의 대중운동 즉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혁명적 학생·청년 조직인 홍위병을 통해 반혁명분자의 명단을 대자보에 올려 공개 비판했다. 군의 실력자 린바오는 류사오치 및 덩샤오핑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어 지방에 유배 보내거나 재교육을 핑계로 숙청했다. 또한 도시의 지식인 청년들을 사회주의 농촌 건설과 참된 공산주의자로 개조한다는 명분으로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1972년 마오쩌둥과 닉스 대통령 회담

이러한 혼락 속에서도 1971년 저우언라이 총리와 키신저 박사 사이의 비밀회담이 성공해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 이루어지고 상하이 코뮤니케가 채택됐다. 6.25 전쟁 이후 적대관계였던 미중 관계가 해빙되어 다음 해인 1973년 워싱턴과 베이징에 각각 연락사무소가 개설됐다. 국내적으로는 저우언라이 총리가 1976년 1월 사망하고 그해 9월 마오쩌둥 주석이 연이어 타계하면서 이른바 반혁명 세력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지병으로 유배지에서 병사한 류사오치와 달리 복권된 덩샤오핑은 단숨에 권력을 장악했다. 현실주의적인 덩샤오핑은 최고 영도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로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펴나간다. 미국은 중국이 민주주의적이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일원이 되리라고 낙관하여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지원하는 등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이러한 미중 간의 30년(1978-2008) 화해와 협력을 차이메리카(Chimerica) 또는 지정학 홀리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미국은 1990년대 정보기술(IT) 분야의 과잉투자로 형성된 거품이 꺼지면서 미국경제가 침체하자 미국의 중앙은행(연준)이 기준 금리를 인하, 대출이 늘어난다. 값싸게 빌린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리면서 부동산 버블(거품)이 생겼다. 이를 우려한 연준이 2006년부터 금리를 올리자 은행들이 대출금 회수를 못 해 자금 경색에 빠지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를 덮쳤다. 미국은 1930년대 대불황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진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중국은 미국에 대한 신뢰와 환상이 깨지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질서를 믿고 도광양회로 무작정 기다릴 수 없음을 알게 됐다. 중국의 입장은 신흥대국 관계에 기초하여 1900년대 초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유럽에 요구한 이른바 ‘루스벨트 추론(수정된 먼로주의)’을 연상케 하는 태평양 양분론을 주장, 중국 측의 서태평양에 대해 미국의 간섭을 배제코자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10년간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소홀히 하고 있었던 아시아 중심의 대외정책을 표방하여 2011년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천명했다. 2016년 미국 제일주의(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를 대선 구호로 내세운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미중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이른바 미중 패권경쟁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추이를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다.

패권의 패(覇)는 으뜸 달(초승달)에서 유래된 으뜸(the first)이라는 뜻이다. 국제질서에서 으뜸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에 대해 신흥국 중국의 도전은 충돌이 예고되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지난 500년간 패권국(ruling power)과 신흥국(rising power) 사이 16번의 패권 교대를 연구했다. 그 결과 12번은 전쟁으로 4번은 평화적으로 해결됐다고 밝히면서 미중 패권경쟁의 전망을 분석했다. 중국 전문가 할 브랜드 등은 2022년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Danger Zone)>라는 저서를 통해 미중 간 충돌은 불가피하지만, 그 충돌은 중국 국력의 지속적인 발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점의 중국(peak China) 국력의 쇠퇴함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중국은 도전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점차 닫히는 것을 우려하여 어딘가에 충돌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미중 양국은 가장 위험한 10년 구간을 통과하고 있는데 중국 인민해방군 창설 100주년이 되는 2027년 전후를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젊었을 때의 키신저

한편 키신저 박사 이후 미중 관계에 가장 정통한 서방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는 자신의 대중외교 경험을 살려 <피할 수 있는 전쟁(The Avoidable War)>를 발간했다. 그는 미중 패권경쟁 이면에는 양국 간의 근본적인 세계관 차이가 있어 상호 오해와 불통을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하고 두 나라가 경쟁하면서도 전략적으로 관리(managed strategic competition)한다면 앨리슨 교수가 우려하고 있는 ‘예정된 전쟁’ 즉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에 관하여(On China)>를 저술한 미중 관계의 최고 권위자인 키신저 박사가 심각한 미중 패권경쟁의 위험을 감지하고 지난 7월 100세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베이징을 방문,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키신저 박사를 비롯한 미국의 지도자들이 중미 양국관계가 정상화되도록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고, 키신저 박사도 언론 인터뷰에서 “재앙적 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 미국은 중국의 지위와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말이 그의 유언이 됐다.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미중 정상회담은 한평생 미중 화해를 바란 키신저 박사의 유산(legacy)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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